≪史記≫<列傳>曰: “孟軻, 趙氏曰: “孟子, 魯公族孟孫之後.” 漢書注云: “字子車.” 一說: “字子輿.” 騶人也, 騶亦作鄒, 本邾國也. 受業子思之門人. 子思, 孔子之孫, 名伋. 索隱云: “王劭以人爲衍字.” 而趙氏註及孔叢子等書亦皆云: “孟子親受業於子思.” 未知是否. 道旣通, 趙氏曰: “孟子通五經, 尤長於詩書.” 程子曰: “孟子曰: ‘可以仕則仕, 可以止則止, 可以久則久, 可以速則速.’, ‘孔子聖之時者也.’ 故知易者莫如孟子. 又曰: ‘王者之跡熄而詩亡, 詩亡然後春秋作.’ 又曰: ‘春秋無義戰.’ 又曰: ‘春秋天子之事’, 故知春秋者莫如孟子.” 尹氏曰: “以此而言, 則趙氏謂孟子長於詩書而已, 豈知孟子者哉?” 游事齊宣王, 宣王不能用. 適梁, 梁惠王不果所言, 則見以爲迂遠而闊於事情. 按史記: “梁惠王之三十五年乙酉, 孟子始至梁. 其後二十三年, 當齊湣王之十年丁未, 齊人伐燕, 而孟子在齊.” 故古史謂 “孟子先事齊宣王後乃見梁惠王·襄王·齊湣王.” 獨孟子以伐燕爲宣王時事, 與史記·荀子等書皆不合. 而通鑑以伐燕之歲, 爲宣王十九年, 則是孟子先游梁而後至齊見宣王矣. 然考異亦無他據, 又未知孰是也. 當是之時, 秦用商鞅, 楚魏用吳起, 齊用孫子·田忌. 天下方務於合從連衡, 以攻伐爲賢, 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 是以所如者不合. 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 述仲尼之意, 作孟子七篇.” 趙氏曰: “凡二百六十一章, 三萬四千六百八十五字.” 韓子曰: “孟軻之書, 非軻自著. 軻旣沒, 其徒萬章·公孫丑相與記軻所言焉耳.” 愚按: 二說不同, 史記近是.

≪사기≫ <열전>에서 말하였다. “맹가는 조씨가 말하였다. “맹자는 노나라 공족 맹손씨의 후손이다.” 한서 주석에서 말하길 “자(字)는 자거이다.”라고 했고 일설에는 “자(字)는 자여이다.”라고 한다. 추나라 사람이니 騶자는 또 鄒라고도 쓰니 본래 주(邾)나라이다. 자사의 문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자사는 공자의 손자이니 이름이 급(伋)이다. 색은에서 말하길 “왕소는 人을 잘못 들어간 글자이다.”라고 했고 조씨의 주석과 공총자 등의 책에서도 모두 “맹자는 자사에게서 직접 학업을 받았다”라고 말하니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겠다. 도가 통하고 나서 조씨가 말하였다. “맹자는 오경에 능통했고 시경과 서경에는 더욱 뛰어났다.” 정자가 말하였다. “맹자가 말하길 ‘벼슬할 수 있으면 벼슬하고 멈출 수 있으면 멈추며 오래할 수 있으면 오래 하고 빨리 할 수 있으면 빨리 한다.’, ‘공자는 성인 가운데 때를 안 자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주역을 안 자는 맹자와 같은 이가 없다. 또 말하길 ‘왕의 자취가 사라지자 시가 사라졌고 시가 사라진 뒤에 춘추가 지어졌다.’라고 했다. 또 말하길 ‘춘추에는 의로운 전쟁이 없다’라고 했다. 또 말하길 ‘춘추는 천자의 일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춘추를 아는 자는 맹자와 같은 이가 없다.” 윤씨가 말하였다. “이것으로 말하면 조씨는 맹자가 시경과 서경에 뛰어나다고 말했을 뿐이니 어찌 맹자를 알겠는가?” 제나라 선왕을 섬기러 갔으나 선왕이 등용하지 못했다. 양나라로 갔으나 양나라 혜왕이 (맹자가) 말한 것을 실행하지 못하였으니 곧 (현실에서) 동떨어져 물정에 어둡다고 여겨졌다. 사기를 살펴보니 “양나라 혜왕의 35년인 을유년에 맹자가 비로소 양에 도착했다. 그 뒤 23년에 제나라 민왕의 10년인 정미년을 맞이하여 제나라 사람이 연나라를 정벌하였는데 맹자가 제나라에 있었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고사에서 말하길 “맹자는 먼저 제나라 선왕을 섬기고 뒤에 곧 양나라 혜왕, 양왕, 제나라 민왕을 만났다”라고 했다. 오직 맹자만이 연나라를 벌하는 것을 선왕 당시의 일이라고 여겼으니 사기, 순자 등의 책과 모두 부합하지 않는다. 통감에서 연나라를 정벌한 해를 선왕 19년이라고 하였으니 곧 맹자가 먼저 양나라로 간 뒤에 제나라에 도착해 선왕을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통감고이에도 다른 근거가 없으니 또 어느 것이 맞는지 알지 못하겠다. 이때를 맞이하여 진(秦)나라는 상앙을 등용하고 초나라와 위나라는 오기를 등용하고 제나라는 손자와 전기를 등용하였다. 천하가 한창 합종(合縱)과 연횡(連橫)에 힘써 공격하고 정벌하는 것을 훌륭하다고 여겼으나 맹가는 마침내 당나라, 우나라, 삼대(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덕을 전술하였으니 이 때문에 도착한 곳에서 (뜻이) 합치되지 않았다. 물러나 만장 등의 무리와 함께 시경과 서경을 순서 짓고 중니의 뜻을 전술하여 ≪맹자≫ 7편을 지었다.” 조씨가 말하였다. “모두 261장이고 34,685자이다.” 한자가 말하였다. “맹가의 책은 맹가가 스스로 저술한 것이 아니다. 맹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그 무리인 만장과 공손추가 서로 함께 맹가가 한 말을 기록한 것일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두 설이 같지 않으니 사기가 사실에 가까운 듯하다.

 

韓子曰: “堯以是傳之舜, 舜以是傳之禹, 禹以是傳之湯, 湯以是傳之文·武·周公, 文·武·周公傳之孔子, 孔子傳之孟軻, 軻之死不得其傳焉. 荀與揚也, 擇焉而不精, 語焉而不詳.” 程子曰: “韓子此語, 非是蹈襲前人, 又非鑿空撰得出, 必有所見. 若無所見, 不知言所傳者何事.”

한자(한유)가 말하였다. “요 임금은 이것을 순 임금에게 전하였고, 순 임금은 이것을 우 임금에게 전하였고, 우 임금은 이것을 탕 임금에게 전하였고, 탕 임금은 이것을 문왕, 무왕, 주공에게 전하였고 문왕, 무왕, 주공은 공자에게 전하였고 공자는 맹가에게 전하였으니 맹가가 죽자 그 전을 얻지 못하였다. 순황과 양웅은 선택은 했으나 정밀하지 못했고 말은 했으나 상세하지 못했다.” 정자가 말하였다. “한자의 이 말은 앞시대 사람을 답습한 것이 아니고 또 빈 말을 꾸며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니 반드시 본 바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 본 바가 없다면 전한 바라고 말한 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又曰: “孟氏醇乎醇者也. 荀與揚, 大醇而小疵.” 程子曰: “韓子論孟子甚善. 非見得孟子意, 亦道不到. 其論荀揚則非也. 荀子極偏駁, 只一句性惡, 大本已失. 揚子雖少過, 然亦不識性, 更說甚道.”

(한유가) 또 말하였다. “맹씨는 순하고도 순한 자이다. 순황과 양웅은 크게는 순하나 작게는 흠이 있다.” 정자가 말하였다. “한자는 맹자가 매우 선하다고 논하였다. 맹자의 뜻을 이해한 것이 아니면 또한 도가 도달하지 못한다. 그가 순황과 양웅을 논한 것은 잘못이다. 순자는 극도로 치우치고 뒤섞였으니 다만 성악 한 구절은 큰 근본이 이미 상실되었다. 양자는 비록 잘못이 적으나 또한 본성을 알지 못하였으니 곧 무슨 도를 말하겠는가.”

又曰: “孔子之道大而能博, 門弟子不能遍觀而盡識也, 故學焉而皆得其性之所近. 其後離散, 分處諸侯之國, 又各以其所能授弟子, 源遠而末益分. 惟孟軻師子思, 而子思之學出於曾子. 自孔子沒, 獨孟軻氏之傳得其宗. 故求觀聖人之道者, 必自孟子始.” 程子曰: “孔子言參也魯. 然顏子沒後, 終得聖人之道者, 曾子也. 觀其啟手足時之言, 可以見矣. 所傳者子思·孟子, 皆其學也.”

(한유가) 또 말하였다. “공자의 도는 크고 넓어서 문하의 제자들은 두루 보아 전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배워서 모두 그 품성의 가까운 것을 얻었다. 그 후에 흩어져 제후들의 나라에 나누어 살았고 또 각각 그 잘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전수했으니 근원에서 멀어져 말단이 더욱 나누어졌다. 오직 맹가만이 자사를 스승 삼았고 자사의 학문은 증자에게서 나왔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고부터는 오직 맹가의 전이 그 종지를 얻었다. 그러므로 성인의 도를 보기를 구하는 것은 반드시 맹자로부터 시작된다.” 정자가 말하였다. “공자는 삼이 노둔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안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 끝내 성인의 도를 얻은 자는 증자이다. 그 손발을 연 때의 말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전한 것은 자사와 맹자 모두 그 학문이다.”

又曰: “揚子雲曰: ‘古者楊墨塞路, 孟子辭而闢之, 廓如也.’ 夫楊墨行, 正道廢. 孟子雖賢聖, 不得位. 空言無施, 雖切何補. 然賴其言, 而今之學者尚知宗孔氏, 崇仁義, 貴王賤霸而已. 其大經大法, 皆亡滅而不救, 壞爛而不收. 所謂存十一於千百, 安在其能廓如也? 然向無孟氏, 則皆服左衽而言侏離矣. 故愈嘗推尊孟氏, 以爲功不在禹下者, 爲此也.”

(한유가) 또 말하였다. “양자운(양웅)이 말하길 ‘옛날에 양묵이 길을 막자 맹자가 말하여 열었으니 넓었다.’라고 했다. 양주와 묵적이 행하자 바른 도가 버려졌다. 맹자가 비록 성현이지만 지위를 얻지 못했다. 헛되이 말하여 베푼 것이 없었으니 비록 간절하긴 지만 무엇에 도움이 되었겠는가. 그러나 그 말에 의지하여 지금의 배우는 자들이 여전히 공씨를 종주로 삼고 인과 의를 숭상하며 왕도를 귀하게 여기고 패도를 천하게 여길 줄 알 뿐이다. 그 큰 원칙과 큰 법칙은 모두 사라져 구하지 못하였으며 썩어 문드러져 거두지 못하였다. 이른바 1000이나 100에 10이나 1이 남아 있는 것이니 그 넓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이전에 맹씨가 없었다면 모두 왼섶을 입고 오랑캐의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맹씨를 추존하여 공로가 우 임금의 아래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或問於程子曰: “孟子還可謂聖人否?” 程子曰: “未敢便道他是聖人, 然學已到至處.” 愚按: 至字, 恐當作聖字.

어떤 사람이 정자에게 물었다. “맹자도 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자가 말하였다. “감히 바로 그가 성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학문이 이미 지극한 곳에 이르렀다.” 내가 생각하기에 至자는 아마 聖자로 써야 할 듯하다.

程子又曰: “孟子有功於聖門, 不可勝言. 仲尼只說一箇仁字, 孟子開口便說仁義. 仲尼只說一箇志, 孟子便說許多養氣出來. 只此二字, 其功甚多.”

정자가 또 말하였다. “맹자는 성인의 문하에 공로가 있으니 이루 다 말하지 못한다. 중니는 다만 인(仁)자 한 개를 말하였으나 맹자는 입을 열면 바로 인의(仁義)를 말하였다. 중지는 다만 지(志)자 한 개를 말하였으나 맹자는 바로 수많은 양기(養氣)를 말해냈다. 다만 이 두 글자는 그 공로가 매우 많다.”

又曰: “孟子有大功於世, 以其言性善也.”

(정자가) 또 말하였다. “맹자는 세상에 큰 공로가 있으니 성선을 말한 것 때문이다.”

又曰: “孟子性善·養氣之論, 皆前聖所未發.”

(정자가) 또 말하였다. “맹자의 성선과 양기의 논의는 모두 이전의 성인이 밝히지 않은 것이었다.”

又曰: “學者全要識時. 若不識時, 不足以言學. 顏子陋巷自樂, 以有孔子在焉. 若孟子之時, 世旣無人, 安可不以道自任.”

(정자가) 또 말하였다. “배우는 자는 오로지 때를 알아야 한다. 만약 때를 알지 못하면 학문을 말하기에 부족하다. 안자는 누항에서 스스로 즐거워했으니 공자가 거기 계셨기 때문이다. 맹자의 시대 같은 경우는 세상에 이미 그런 사람이 없으니 어찌 도를 스스로 맡지 않을 수 있겠는가?”

又曰: “孟子有些英氣. 纔有英氣, 便有圭角, 英氣甚害事. 如顏子便渾厚不同, 顏子去聖人只豪髮閒. 孟子大賢, 亞聖之次也.” 或曰: “英氣見於甚處?” 曰: “但以孔子之言比之, 便可見. 且如冰與水精非不光. 比之玉, 自是有溫潤含蓄氣象, 無許多光耀也.”

(정자가) 또 말하였다. “맹자는 약간 영기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영기가 있으면 바로 규각이 있게 되니 영기는 일에 매우 해롭다. 안자 같은 경우는 바로 순수하고 인정이 두터워 (맹자와) 같지 않았으니 안자는 성인과의 거리가 다만 털 한 가닥 사이였다. 맹자는 대현으로 아성의 다음이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영기가 어디에 나타납니까?” (정자가) 말하였다. “다만 공자의 말씀과 비교하면 바로 볼 수 있다. 또 얼음과 수정이 빛나지 않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옥에 비교하자면 스스로 따뜻하고 윤기가 있는 것이 함축된 기상이 있는 것이니 수많은 광택은 없다.”

楊氏曰: “≪孟子≫一書, 只是要正人心, 敎人存心養性, 收其放心. 至論仁·義·禮·智, 則以惻隱·羞惡·辭讓·是非之心爲之端. 論邪說之害, 則曰: ‘生於其心, 害於其政.’ 論事君, 則曰: ‘格君心之非’, ‘一正君而國定’. 千變萬化, 只說從心上來. 人能正心, 則事無足爲者矣. 大學之脩(修)身·齊家·治國·平天下, 其本只是正心·誠意而已. 心得其正, 然後知性之善. 故孟子遇人便道性善. 歐陽永叔卻言 ‘聖人之敎人, 性非所先’, 可謂誤矣. 人性上不可添一物, 堯舜所以爲萬世法, 亦是率性而已. 所謂率性, 循天理是也. 外邊用計用數, 假饒立得功業, 只是人欲之私. 與聖賢作處, 天地懸隔.”

양씨(양시)가 말하였다. “≪맹자≫ 책 한 권은 다만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사람들이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수양하며 잃어버린 마음을 찾도록 만든다. 인의예지를 말한 곳에 이르러서는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으로 단서를 삼았다. 사설의 해를 말한 곳에 이르러서는 곧 ‘그 마음에서 생겨나 그 정치를 해친다’고 말하였다. 임금을 섬기는 것을 말한 곳에 이르러서는 곧 ‘임금의 마음의 잘못을 바로잡는다’, ‘한번 임금을 바로 잡으면 나라가 안정된다’라고 말하였다. 천만번 변화하여 다만 마음에서부터 말해왔다. 사람이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일이 하잘 것이 없을 것이다. 대학의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는 그 근본이 다만 정심, 성의일 뿐이다. 마음이 바름을 얻은 뒤에 본성이 선함을 안다. 그러므로 맹자는 사람을 만나면 바로 본성이 선하다고 말하였다. 구양영숙(구양수)은 반대로 ‘성인이 사람을 가르칠 때 본성은 우선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으니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의 본성에는 한 물건도 붙일 수 없고 요 임금과 순 임금이 만세의 본보기가 된 이유도 본성을 따랐을 뿐이다. 이른바 본성을 따르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다. 밖에서 계책를 쓰고 술수를 써서 가령 공업을 세운다고 해도 다만 인욕의 사사로움일 뿐이다. 성현이 일으킨 것과는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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