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서(六書)란 한자가 만들어지는 원리와 운용되는 원리를 여섯 가지로 정리한 이론이다. 상형(象形), 지사(指事), 회의(會意), 형성(形聲), 전주(轉注), 가차(假借)로 나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고대인들이 육서라는 원칙을 세우고 거기에 따라 글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한자를 분석하여 여섯 가지로 귀납시킨 것이라는 사실이다.

육서라는 말은 주례(周禮)에 처음 보인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保氏掌諫王惡, 而養國子以道, 乃敎之六藝: 一曰五禮, 二曰六樂, 三曰五射, 四曰五馭, 五曰六書, 六曰九數.

보씨는 왕의 나쁜 점을 간언하는 일을 관장하였고 고위층 자제들을 도()로 양성하였는데 바로 육예를 가르쳤으니 첫째는 오례이고, 둘째는 육악이고, 셋째는 오사이고, 넷째는 오어이고, 다섯째는 육서이고, 여섯째는 구수이다."

 

후한 말 경학자 정현(鄭玄)의 주석에 따르면 오례란 다섯 예법이고, 육악이란 여섯 음악, 오사란 다섯 종류의 승마 기술, 구수란 아홉 종류의 산술이다. 그렇다면 육예 가운데 육서가 하나 남는다. 정현은 정중(鄭衆)1)의 설을 인용하여 육서란 상형, 회의, 전주, 처사(處事=지사), 가차, 해성(諧聲=형성)이라고 설명했다. 순서와 명칭은 다소 차이가 있으나 위에서 말한 육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후한 초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古者八歲入小學, 故周官保氏掌養國子, 敎之六書, 謂象形·象事·象意·象聲·轉注·假借, 造字之本也.

옛날에는 여덟 살이 되면 소학에 들어갔다. 그래서 주관의 보씨는 고위층 자제들을 양성하는 일을 관장하였고 그들에게 육서를 가르쳤으니 상형, 상사(=지사), 상의(=회의), 상성(=형성), 전주, 가차를 말한다. 글자를 만드는 근본이다."

 

여기서도 육서를 글자를 만드는 원리라고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위에서 인용한 두 문헌의 기록은 의심의 여지 없이 글자를 만드는 원리를 말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주나라 때 이미 육서라는 이론이 존재한 것이 된다. 그러나 주례의 기록을 자세히 보면 조금 균형이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는 모두 예법, 음악, 승마, 산술 등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데 육서를 구성 원리 해석한다면 이는 문자 그 자체가 아니게 된다. 아쓰지 데쓰지(阿辻哲次)는 '여섯 종류의 서체'였을 가능성을 제기하였고 현재로서는 그와 같은 해석이 가장 합당할 것이다.2) 

 그렇다면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저술한 후한 말 허신(許愼)은 어땠을까? 사실 지금의 육서 개념은 그가 처음 정립한 것이다.  허신이 말한 육서의 개념은 아래와 같다.

 

一曰指事. 指事者, 視而可識, 察而見意, '上·下'是也.

첫째는 지사이다. 지사란 보아서 알 수 있고 살펴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니 가 이것이다.

二曰象形. 象形者, 畵成其物, 隨體詰詘, '日·月'是也.

둘째는 상형이다. 상형이란 사물을 그려 만드는데 형체에 따라 구부리는 것이니 이 이것이다.

三曰形聲. 形聲者, 以事爲名, 取譬相成, '江·河'是也.

셋째는 형성이다. 형성이란 개념을 이름(글자의 의미)으로 삼고 비유(독음이 같거나 비슷한 것)를 취하여 서로 완성하는 것이니 가 이것이다. 

四曰會意. 會意者, 比類合誼, 以見指撝, '武·信'是也.

넷째는 회의이다. 회의란 부류를 나란히 놓고 의미를 조합하여서 가리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 이것이다.

五曰轉注. 轉注者, 建類一首, 同意相受, '考·老'是也.

다섯째는 전주이다. 전주란 종류 별로 하나의 부수를 세워 같은 의미를 서로 주고받는 것이니 가 이것이다.

六曰假借. 假借者, 本無其字, 依聲託事, '令·長'是也.

여섯째는 가차이다. 가차란 본래 그 글자가 없어 소리에 의거해 개념을 가탁한 것이니 이 이것이다. 

 

허신은 설문해자에서 지사를 상형보다 먼저 언급한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으나 아마도 상형보다 지사가 근본적으로 의미와 연관이 깊다고 생각한 듯하다. 아래에서는 허신이 말한 육서를 순서를 재정리해서 풀이하겠다.

 

1. 상형은 '형체를 본뜨다'라는 의미이다. 지사와 함께 글자를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다. 과 이 여기에 해당한다. {해(천체)}와 {달(천체)}이라는 단어를 글자로 기록하기 위해 그 단어가 의미하는 대상, 즉 ☀️와 🌙의 형체를 그대로 본뜬 것이다. 추가로 , , 등의 예시가 있다.

2. 지사는 '개념을 가리키다'라는 의미이다. 지사는 상징적인 부호를 사용하여서 기록하고자 하는 어휘를 나타낸 것이다. 가 여기에 해당하며 옛 글자는 각각 , 의 형태였다. {위}와 {아래}라는 단어를 기록하기 위해 기준선()을 하나 그리고 각각 위와 아래를 표시한 것이다. 추가로 , , 등의 예시가 있다.

3. 회의는 '의미를 조합하다'라는 의미이다. 회의는 두 글자 이상을 합하여 그 의미를 조합하는 방식이다. 글자를 조합하는 이유는 무수히 많은 단어를 나타내기 위해 그에 해당하는 글자를 다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여기에 해당한다.  를 합한 글자이다. 는 본래 발을 상형한 글자로, {가다}라는 단어를 나타내기도 했다. 창을 들고 진격한다는 의미 조합에서 {무력}이라는 단어를 유추할 수 있다. 을 합한 글자로, 사람의 말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 조합에서 {믿다}라는 단어를 유추할 수 있다. 또 연구에 따르면 은 상고시대에 발음에 유사성이 있었다. 추가로 , , 등의 예시가 있다.

4. 형성은 '의미와 소리'라는 의미이다. 역시 회의와 마찬가지로 두 글자 이상을 합하여 그 의미를 조합하는 방식인데, 반드시 발음 부분이 있어야 한다. 은 의미 부분 (←)와 발음 부분 (강←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고대중국어로 흐르는 큰 물 줄기를 의미하는 단어의 발음이 과 유사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구성이 된 것이다. 는 의미 부분 (←)와 발음 부분 (하←가)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 구성 원리가 같다. 참고로 는 각각 장강(長江, 양쯔강은 그 지류)과 황하(黃河)를 가리킨다. 추가로 , , 등이 있다.

5. 가차는 '빌리다'라는 의미이다. 사실 가차는 글자를 만드는 방법은 아니고 글자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한자가 만들어질 당시 중국어에는 동음이의어, 즉 발음은 같지만(혹은 비슷하지만) 의미는 별개인 단어들이 매우 많이 존재했다. 이는 단음절 언어라는 중국어의 특성이다. 그 가운데 상형, 지사, 회의 등의 방법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단어들, 특히 문법적인 단어들이 자주 가차의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예를 들어서 은 본래 우거진 풀을 나타내는 (망) 가운데 을 넣어 {(해가) 저물다}라는 단어를 나타내는 회의자였다. 그런데 이 단어의 발음이 {없다}라는 뜻의 단어와 유사했기 때문에 글자는 으로 쓰고 의미는 {없다}로 이해하는 용법이 생겼다. 이것이 바로 가차의 원리이다. 그러자 자의 본래 의미, 즉 {저물다}라는 단어를 나타내기 위해 자에 다시 자를 붙여 라는 글자를 만들어냈다. 는 상고시대에 발음이 /*mˤak/과 /*mˤak-s/ 3)로 거의 같았다.

그런데 허신이 예시로 든 은 방금 설명한 원리와는 조금 다르다. 은 {명령하다}라는 단어를 기록했고 은 {길다} 혹은 {성장하다}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게 인신(引伸, 파생)되어서 {명령을 내리는 사람}, {우두머리} 등의 의미로 확장되었다. 한나라 때는 현()의 장관을 현령(縣令) 혹은 현장(縣長)이라고 불렀는데 바로 이 경로를 통해 의미가 파생된 것이다. 허신은 동음이의어 원리로 의미가 늘어난 자나 의미 파생의 원리로 의미가 늘어난 자의 경우를 모두 가차로 인식한 것이나.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의미 파생은 문자가 아니라 언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과거보다 이론이 더욱 발전된 현재의 한자학의 입장에서는 자와 같은 사례만을 가차로 본다. 가차의 예시는 (어조사, =), (대명사), (그러하다) 등이 있다.

6. 전주는 '바꿔서 풀이하다'라는 의미이다. 허신은 考와 老를 예시로 들었다. 그리고 설문해자에는 를 각각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老, 考也. 七十曰老. 从人毛匕. 言須髮變白也.

이다. 70살을 라고 말한다. , , (의 의미)를 따른다. 수염과 머리카락이 희게 바뀌는 것을 말한다.”

考, 老也. 从老省, 丂聲.

이다. 의 생략형(의 의미)을 따르고 (고←교)의 소리이다.”

즉 서로 의미를 주고 받는, 다시 말해 호훈(互訓)하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考와 老는 자형이 서로 비슷하고, 설문해자에서 같은 부()에 속하며, 발음이 비슷하고, 의미도 유사하기 때문에 역대로 그에 대한 해설이 분분하였다. 왜냐하면 허신의 설명이 너무 간략한 나머지 그가 정의한 전주가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주를 제외하고도 한자가 만들어지고 운용되는 원리를 설명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전주라는 개념은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므로 현재의 한자학에서는 이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것과는 별개로 허신이 가리킨 전주의 개념이 무엇인지 연구하는 과정은 앞으로도 필요할 것이다.


1) 동한의 경학자.

2) ≪한자학≫(아쓰지 데쓰지 저, 심경호 역).

3) 미국과 프랑스의 언어학자 윌리엄 백스터William Baxter)와  로랑 사가르(Laurent Sagart)의 저서 "Old Chinese: A New Reconstruction"의 재구음을 따랐다. 


https://youtu.be/xFBsIxXfy7A

https://www.youtube.com/watch?v=x_wPyEfB3-c 

모성재에서 월운 씀

한자는 한 글자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번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본의(本義)란 최초에 나타내었던 의미를 뜻한다.

 

해(천체)

달(천체)

정벌하다

오른손

 

본의에서 파생을 통해 의미가 추가되는데 이것을 인신의(引伸義)라고 한다.1) 파생으로 통해 만들어진 의미이기 때문에 인신의는 본의와 관련이 깊다. 즉, 한 글자가 표시하던 단어가 다의어가 되면서 의미가 자연히 늘어난 경우이다.

 

해(천체) → 날(시간)

달(천체) → 달(시간)

정벌하다 → 바르게 하다

 

반면 본래 글자와 전혀 상관없으나 발음의 유사성으로 인해 글자를 빌려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가차의(假借義)라고 한다. 다시 말해 가차는 동음어(혹은 유사한 음의 단어)를 음차함으로써 의미가 늘어난 것이다.2)

 

코 → 스스로

새 → 어조사(=)

오른손 → 또

 

다시 말해 한 글자가 여러 의미를 나타내는 경우는 1. 해당 글자가 나타내는 단어의 뜻이 늘어난 경우(인신), 2. 해당 글자가 나타내는 단어와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이의어(異義語)가 그 글자를 빌린 경우(가차)가 있다.

 

그러나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른바 일자다용(一字多用)이라는 현상이다. 는 본래 여자라는 뜻을 가진, 발음은 /*nraʔ/ 3)인 단어를 나타낸다. 그런데 어머니라는 뜻을 가진, 발음인 /*məʔ/ 4)인 단어에도 사용되었다. 이것이 한 글자를 여럿으로 쓰는 일자다용이다. 이것은 인신도 가차도 아닌 현상이다.

 

즉 인신, 가차, 일자다용으로 인해 하나의 한자가 여러 뜻, 혹은 여러 단어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1)​ 인신의를 파생의로 고쳐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지인의 의견이 있다.

2) 가차는 음차와 같은 원리이나 현재는 보통 외래어에 대해 음차 내지는 음역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3) 의 상고 중국어 발음. 중국의 언어학자 정장상팡(鄭張尚芳, 1933 - 2018)의 저서 ≪상고음계(上古音系)≫의 재구음을 따랐다.

4) 의 상고 중국어 발음. 같은 재구음을 따랐다.

모성재에서 월운 씀

많은 사람들이 한자가 표의문자(表意文字, ideogram)라고 말한다.1) 이는 한자가 뜻[idea]을 나타내는 문자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는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일단 한자는 뜻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더 자세한 논의를 위해 문자란 무엇인지를 우선 명확히 하겠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문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간의 언어를 적는 데 사용하는 시각적인 기호 체계."

 

여기서 키워드는 언어와 기호이다. 문자란 언어가 담겨 있는 기호라는 의미이다. 자연어(natural language)는 공기의 진동, 즉 말소리를 매개로 전달된다. 문자의 발생이 필연적으로 언어의 발생보다 늦다는 점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문자는 말소리를 기록하는 체계가 된다. 한자라고 다르란 법은 없다. 아래의 예시를 보라.

도상과 문자

이것은 중국의 언어학자 탕란(唐蘭, 1901~1971)이 그의 저서 중국 문자학(中國文字學)에서 제시한 사진이다. 왼쪽은 동굴 벽화, 다시 말해 그림이다. 반면 오른쪽은 갑골문으로 오른쪽에서부터 [인: 사람], [사: 쏘다], 鹿[록: 사슴]이다. 둘은 언뜻 보면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이다. 왼쪽의 그림은 의미를 담고 있긴 하다. 그러나 언어가 담겨 있지는 않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사람이 사슴을 쏘다.”, “사슴이 사람에게 맞다.”, “사람이 사슴을 위협하다.”, “사람이 사슴을 쫓아내다.” 등등 매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반면 오른쪽의 갑골문자는 고대 중국어의 문법 체계를 이해하고 갑골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람이 사슴을 쏘다.”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언어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왼쪽의 사진은 차라리 픽토그램(pictogram)​​2)에 더 가깝다.

 

이제 문자가 무엇인지는 알아보았으니, 한자는 어떤 유형의 문자인지 밝힐 차례이다. 우리가 문자의 유형을 분류할 때는 그 문자가 표기하는 언어의 어떤 부분과 대응되는지를 본다. 한글 자모는 한국어의 자음과 모음에, 로마자(Latin alphabet)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의 자음과 모음에 대응된다. 이 둘은 자음과 모음, 다시 말해 말소리의 최소 단위인 음소(音素, phoneme)를 나타내기 때문에 음소문자(alphabet)로 분류된다. 가나(假名) 문자는 일본어의 음절에 대응되기 때문에 음절문자(syllabary)로 분류된다. 음소문자와 음절문자 모두 해당 언어의 소리하고만 대응하는 표음문자(表音文字, phonogram)이다. 그렇다면 한자는 어떨까?

 

미국의 중국학자 존 드프랜시스(John DeFrancis, 1911 - 2009)는 그의 저서 "중국어: 사실과 환상(The Chinese Language: Fact and Fantasy)"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Chinese characters represent words (or better, morphemes), not ideas, and they represent them phonetically, for the most part, as do all real writing systems despite their diverse techniques and differing effectiveness in accomplishing the task.

한자는 단어(더 알맞게는, 형태소)를 나타내지 뜻을 나타내지는 않고, 대부분의 경우, 역할 완수에 있어 다양한 기술과 상이한 효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실질적인 문자 체계가 그러하듯 한자는 형태소를 음성적으로 나타낸다."

 

"Boodberg has suggested that it be replaced by the term "logographic,"……

부드버그3)는 이것이 '표어문자'(表語文字, logogram)라는 용어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I think we should therefore answer the question posed at the beginning of this section by saying that Chinese characters have evolved from pictographic symbols to a morphosyllabic (or possibly syllabomorphemic) system of writing.

나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 부분의 처음에 제기된 질문(From Pictographs to What?)에 ‘한자는 도상적(圖像的)인 기호에서부터 형태소-음절(혹은 음절-형태소) 체계의 문자로 진화했다’고 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논의와 같이 한자는 중국어의 형태소[語素]와 대응되며 대개의 경우 음성적인 방식으로 의미를 전달한다. 예를 들어 [래: 오다]는 ‘보리[]’를 상형한 문자이다. 그렇기에 본래 의미도 {보리}였다. 원래는 보리 그림과 는 차이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보리}를 의미하는 고대 중국어 단어인 /*mrɯːɡ/ 4)와 연결되면서 언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는 문자의 모양뿐만 아니라 소리까지도 의미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만 들어서는 아직 한자의 음성적인 기능이 크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훗날 가차(假借)라고 명명되는, 음성적 차용(phonetic loan)이 일어난다. 고대 중국어에서는 {오다}라는 단어가 우연히도 /*m·rɯːɡ/ 5)으로 발음되었다. 그러나 그때 아직 {오다}에 대응되는 글자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두 단어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라는 글자를 빌려서 {오다}도 표기하게 되었다. {오다}라는 단어와 라는 글자가 연결된 것은 단순히 음성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자는 많은 경우에 중국어의 단어(간혹 형태소)와 대응하며, 그 발음은 단음절(monosyllable), 즉 하나의 음절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한자를 단순히 표의문자로 볼 것이 아니라 표어문자, 더 정확히는 형태소-음절 문자로 분류해야 한다.


1) 한자를 상형문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한자의 조자(造字) 원리를 공부하고 나면 틀린 말임을 너무 쉽게 알 수 있으므로 이 게시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2)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그림. 컴퓨터의 아이콘, 올림픽의 종목별 표지, 비상구 표지, 남녀 화장실 표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3) 미국의 중국학자 피터 A. 부드버그(Peter A. Boodberg, 1903 - 1972)를 가리킨다.

4) 의 상고 중국어 발음. 중국의 언어학자 정장상팡(鄭張尚芳, 1933 - 2018)의 저서 ≪상고음계(上古音系)≫의 재구음을 따랐다.

5) 의 상고 중국어 발음. 같은 재구음을 따랐다.

모성재에서 월운 씀

문자학이란 단어에 대해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세계 문자의 종류 및 그에 대한 역사, 표기법의 원리, 표기법으로 실현되는 문자 언어의 특징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그러나 실제로 문자학이라는 단어는 한자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는 문자라는 단어가 전통적으로 한자를 가리켰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후한의 경학자 허신(許愼)이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은 이후, [문: 글자]은 단일 구조의 한자를, [자: 글자]는 복합 구조의 한자를 뜻하게 되었고 오랫동안 한자를 문자라고 불러왔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중원에 존재했던 국가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국가들은 언어 기록 수단이 없었거나 비교적 늦게 갖추어졌다는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주변에 딱히 글자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던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문자가 곧 한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서양 세력의 유입과 한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자국어 표기 수단 확보는 한자라는 명칭을 만들어냈다. 바로 한족(漢族)의 문자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문자학이라는 단어도 명칭이 바뀔 필요가 있다. 중국 문자학은 어떨까? 이것도 그리 적절하지는 않다. 중국 문자학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의 문자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인데, 중국에는 한족(漢族)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의 소수민족들 중에는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가진 경우가 꽤 있다. 그러나 그들의 문자는 한자가 아니기에 연구대상이 들어가지 않으므로 중국 문자학도 적합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위의 두 가지 이유를 바탕으로 한자를 연구하는 학문은 한자학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앞으로 이 블로그에서는 문자학 내지는 중국문자학이라고 흔히 지칭되는 학문을 한자학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모성재에서 월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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