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문의 정의
‘한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흔히 ‘한자가 문장을 이룬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다음의 예시는 모두 한자가 문장을 이룬 것이다.
A)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夘乙抱遣去如1)
B) 春苑 紅尓保布 桃花 下照道尓 出立嫺嬬2)
C) 東臨碣石 以觀滄海 水何澹澹 山島竦峙 (하략)3)
D) 你 一會看我 一會看雲 我覺得 你看我時很遠 你看雲時很近4)
A)는 향가(鄕歌)로 고대 한국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B)는 ≪만요슈(萬葉集)≫에 수록된 노래로 고대 일본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C)는 고대 중국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D)는 현대 중국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네 가지는 모두 한자로 표기되어 있지만 각기 다른 언어이다. 따라서 원어 화자들은 각자의 언어로 이 문장들을 읽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한자의 나열로 표기되었다고 해서 모두 한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한문은 무엇일까? 우선 한문이 언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한 언어가 다른 언어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문법 체계와 어휘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문이 어떠한 문법 체계와 어휘를 가지는지 주목해야 한다.
고대 중국어: 상(商) – 주(周) – 진(秦) – 한(漢) – 위진(魏晉) 남북조
근대 중국어: 수(隋)·당(唐) – 송(宋) – 원(元) – 명(明) – 청(淸)
현대 중국어: 근현대 중국
한문(漢文)이란 고대 중국어의 서면어(書面語)를 의미한다. 통사 구조에 따른 중국어의 역사적 분류에는 고대 중국어(古代漢語), 근대 중국어(近代漢語), 현대 중국어(現代漢語)가 있다.5) 고대 중국어는 현재 확인되는 중국어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상나라 때부터 위진 남북조 시대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를 거치며 앞의 시대와 비교했을 때 문법구조에 큰 변화가 생겼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 중국어의 기초가 되는 근대 중국어이다. 현대 중국어는 ‘니 하오(你好)’라든가 ‘워 아이 니(我愛你)’로 대표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국어이다. 한문은 바로 이 고대 중국어의 문법 체계에 따라 한자라는 문자로 기록된 서면어를 가리키는 것이다.
한문은 물론 서면어지만 고대 중국어의 구어(口語)를 많이 반영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후 근대 중국어 시기에 접어들며 입말은 빨리 변하였으나, 비교적 보수적인 글말은 고대 중국어를 모방한 형태로 계속 사용했고 하나의 표준적인 문체를 이루었다.6) 이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입말과 글말(한문)이 점점 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한문의 문체는 주로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의 문헌을 전범(典範)으로 삼고 있다. 공자(551 - 479 BCE) 시대부터 진(秦)나라의 중국 통일(221 BCE) 때까지 사용된 중국어를 고전 중국어(古典中國語, Classical Chinese)라고 부르고 그 이전에 사용된 중국어를 전고전 중국어(前古典中國語, Preclassical Chinese)라고 부른다.7) 따라서 같은 한문이라도 시대에 따라 문법이 조금씩 다르다. 고전 중국어의 문헌으로는 ≪춘추좌전(春秋左傳)≫, ≪국어(國語)≫, ≪논어(論語)≫, ≪맹자(孟子)≫, ≪장자(莊子)≫, ≪순자(荀子)≫, ≪한비자(韓非子)≫ 등이 있으며 전고전 중국어의 문헌에는 상나라 때의 갑골문(甲骨文), 서주(西周) 시기의 금문(金文), ≪주역(周易)≫, ≪시경(詩經)≫, ≪상서(尚書)≫ 등이 있다.
2. 한문의 역할
한문은 전근대 동아시아 공통의 서면어로서 기능했다. 한문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그 주변국에서도 사용되었다. 이는 당시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자국어를 표기할 문자를 아직 마련하지 못했거나, 설령 고유 문자가 있었더라도 아직 그 문자가 사회문화적 이유로 널리 퍼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의 한자와 한문을 빌려 기록을 남겼고 이런 관습은 근대까지도 이어졌다. 특히 공식적인 문서에는 대부분 한문을 사용했다.
3. 한문과 한자의 구별
한문은 언어이고 한자는 한문의 문자인 동시에 어휘(혹은 형태소)가 된다. 한문은 고대 중국어의 서면어이고 한자는 그것을 기록하는 문자이다. 다만 한자는 다른 문자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의 한글이나 서양의 로마자를 예로 들어보자. ㄱ, ㄴ, ㄷ, ㅏ, ㅑ, ㅓ, ㅕ 등과 같은 글자를 배운다고 한국어를 구사할 수는 없다. 로마자의 경우도 역시 a, b, c, d, e, f, g 등을 배웠다고 영어나 프랑스어 등을 구사할 순 없다. 해당 언어를 말할 수 있는 단계가 되려면 단어를 배워야만 한다. {구름}, {나무}, {다람쥐}, {apple}, {book}, {card} 등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문자가 발음만을 표기하는 것에 비해 한자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단어를 표기할 수 있다. 家[가: 집]라는 글자를 배우는 순간 {집}을 의미하는 단어를 하나 배우는 것이다. 물론 후대로 갈수록 2음절 이상의 합성어들이 증가하지만 그럼에도 한자는 형태소를 표기하므로 여전히 하나의 의미를 나타낼 수 있다.
위와 같은 이유로 한자가 다른 문자들에 비해 양이 많은 것이다. 소리를 나타내는 글자의 수는 해당 언어의 말소리를 표기할 정도의 양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한자는 한문의 형태소를 표기할 수 있을 만큼의 글자 수가 필요하게 된다.8) 단기적으로는 학습에 있어 소리를 나타내는 문자보다 양이 많아서 부담스럽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언어 학습의 목표는 해당 언어를 구사하는 것에 있고 결국 어휘 학습은 필수라는 점에서 볼 때, 문자와 단어가 합쳐져 있는 형식인 한자는 딱히 불리한 조건에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1) 선화공주님은 / 남 몰래 사랑을 나누고 / 맛둥 도련님을 /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백제 무왕의 <서동요(薯童謠)>
2) 봄의 정원을 / 다홍으로 물들인 / 복숭아 꽃빛 / 내리쪼이는 길에 / 나와 서 있는 소녀.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의 <4139번 노래(4139番歌)>
3) 동쪽 갈석산에 올라 푸른 바다를 바라보니 / 물은 참으로 출렁출렁하고 산과 섬은 높이 솟아있네. (하략)
조조(曹操)의 <관창해(觀滄海)>
4) 당신은 / 잠깐 나를 보다가 / 잠깐 구름을 보네요 / 내 생각에는 / 당신이 나를 볼 때는 아주 멀고 / 당신이 구름을 볼 때는 아주 가까운 듯해요.
구청(顧城)의 <멂과 가까움(遠和近)>
5) 중국의 언어학자 뤼수샹(呂叔湘,1904 - 1998 )은 그의 저서 ≪근대중국어지시대체사·서문(近代漢語指代詞·序)≫에서 고대 중국어와 근대 중국어의 분기점을 만당(晩唐)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로 보았으나 구분의 편의상 수·당 시대를 모두 근대 중국어에 포함시켰음을 밝힌다.
6) 당나라의 변문(變文), 송나라의 어록(語錄), 화본(話本) 등 당시의 입말을 반영한 이른 시기의 백화문(白話文)이 등장하기도 했으나 격식을 차린 문서는 고대 중국어를 모방한 형태, 즉 한문을 사용했다. 이러한 현상은 백화문 운동이 일어나는 청나라 말까지 계속 이어진다.
7) 캐나다의 중국학자 에드윈 풀리블랭크(Edwin Pulleyblank, 1922 - 2013)의 저서 ≪고전 중국어 문법 강의(Outline of Classical Chinese Grammar)≫를 참고했다.
8) 물론 실제로는 두 개 이상의 로마자를 합해 또 다른 소리를 표기하기도 하듯이(c와 h가 합쳐져 /tʃ/ 소리를 나타내는 등) 한자도 조합을 통해 어휘를 나타내는 방식이 발달하였기 때문에 모든 단어마다 그에 대응하는 하나의 한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성재에서 월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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