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한자가 표의문자(表意文字, ideogram)라고 말한다.1) 이는 한자가 뜻[idea]을 나타내는 문자라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는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일단 한자는 뜻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더 자세한 논의를 위해 문자란 무엇인지를 우선 명확히 하겠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문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간의 언어를 적는 데 사용하는 시각적인 기호 체계."

 

여기서 키워드는 언어와 기호이다. 문자란 언어가 담겨 있는 기호라는 의미이다. 자연어(natural language)는 공기의 진동, 즉 말소리를 매개로 전달된다. 문자의 발생이 필연적으로 언어의 발생보다 늦다는 점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문자는 말소리를 기록하는 체계가 된다. 한자라고 다르란 법은 없다. 아래의 예시를 보라.

도상과 문자

이것은 중국의 언어학자 탕란(唐蘭, 1901~1971)이 그의 저서 중국 문자학(中國文字學)에서 제시한 사진이다. 왼쪽은 동굴 벽화, 다시 말해 그림이다. 반면 오른쪽은 갑골문으로 오른쪽에서부터 [인: 사람], [사: 쏘다], 鹿[록: 사슴]이다. 둘은 언뜻 보면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이다. 왼쪽의 그림은 의미를 담고 있긴 하다. 그러나 언어가 담겨 있지는 않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사람이 사슴을 쏘다.”, “사슴이 사람에게 맞다.”, “사람이 사슴을 위협하다.”, “사람이 사슴을 쫓아내다.” 등등 매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반면 오른쪽의 갑골문자는 고대 중국어의 문법 체계를 이해하고 갑골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람이 사슴을 쏘다.”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언어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왼쪽의 사진은 차라리 픽토그램(pictogram)​​2)에 더 가깝다.

 

이제 문자가 무엇인지는 알아보았으니, 한자는 어떤 유형의 문자인지 밝힐 차례이다. 우리가 문자의 유형을 분류할 때는 그 문자가 표기하는 언어의 어떤 부분과 대응되는지를 본다. 한글 자모는 한국어의 자음과 모음에, 로마자(Latin alphabet)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의 자음과 모음에 대응된다. 이 둘은 자음과 모음, 다시 말해 말소리의 최소 단위인 음소(音素, phoneme)를 나타내기 때문에 음소문자(alphabet)로 분류된다. 가나(假名) 문자는 일본어의 음절에 대응되기 때문에 음절문자(syllabary)로 분류된다. 음소문자와 음절문자 모두 해당 언어의 소리하고만 대응하는 표음문자(表音文字, phonogram)이다. 그렇다면 한자는 어떨까?

 

미국의 중국학자 존 드프랜시스(John DeFrancis, 1911 - 2009)는 그의 저서 "중국어: 사실과 환상(The Chinese Language: Fact and Fantasy)"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Chinese characters represent words (or better, morphemes), not ideas, and they represent them phonetically, for the most part, as do all real writing systems despite their diverse techniques and differing effectiveness in accomplishing the task.

한자는 단어(더 알맞게는, 형태소)를 나타내지 뜻을 나타내지는 않고, 대부분의 경우, 역할 완수에 있어 다양한 기술과 상이한 효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실질적인 문자 체계가 그러하듯 한자는 형태소를 음성적으로 나타낸다."

 

"Boodberg has suggested that it be replaced by the term "logographic,"……

부드버그3)는 이것이 '표어문자'(表語文字, logogram)라는 용어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I think we should therefore answer the question posed at the beginning of this section by saying that Chinese characters have evolved from pictographic symbols to a morphosyllabic (or possibly syllabomorphemic) system of writing.

나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 부분의 처음에 제기된 질문(From Pictographs to What?)에 ‘한자는 도상적(圖像的)인 기호에서부터 형태소-음절(혹은 음절-형태소) 체계의 문자로 진화했다’고 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논의와 같이 한자는 중국어의 형태소[語素]와 대응되며 대개의 경우 음성적인 방식으로 의미를 전달한다. 예를 들어 [래: 오다]는 ‘보리[]’를 상형한 문자이다. 그렇기에 본래 의미도 {보리}였다. 원래는 보리 그림과 는 차이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보리}를 의미하는 고대 중국어 단어인 /*mrɯːɡ/ 4)와 연결되면서 언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는 문자의 모양뿐만 아니라 소리까지도 의미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만 들어서는 아직 한자의 음성적인 기능이 크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훗날 가차(假借)라고 명명되는, 음성적 차용(phonetic loan)이 일어난다. 고대 중국어에서는 {오다}라는 단어가 우연히도 /*m·rɯːɡ/ 5)으로 발음되었다. 그러나 그때 아직 {오다}에 대응되는 글자가 존재하지 않았는데 두 단어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라는 글자를 빌려서 {오다}도 표기하게 되었다. {오다}라는 단어와 라는 글자가 연결된 것은 단순히 음성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자는 많은 경우에 중국어의 단어(간혹 형태소)와 대응하며, 그 발음은 단음절(monosyllable), 즉 하나의 음절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한자를 단순히 표의문자로 볼 것이 아니라 표어문자, 더 정확히는 형태소-음절 문자로 분류해야 한다.


1) 한자를 상형문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는 한자의 조자(造字) 원리를 공부하고 나면 틀린 말임을 너무 쉽게 알 수 있으므로 이 게시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2)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묘사한 그림. 컴퓨터의 아이콘, 올림픽의 종목별 표지, 비상구 표지, 남녀 화장실 표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3) 미국의 중국학자 피터 A. 부드버그(Peter A. Boodberg, 1903 - 1972)를 가리킨다.

4) 의 상고 중국어 발음. 중국의 언어학자 정장상팡(鄭張尚芳, 1933 - 2018)의 저서 ≪상고음계(上古音系)≫의 재구음을 따랐다.

5) 의 상고 중국어 발음. 같은 재구음을 따랐다.

모성재에서 월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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