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천하 사람들에게 밝은 덕을 밝히고자 한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렸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 자는 먼저 그 집안을 동등하게 대했고, 그 집안을 동등하게 대하고자 한 자는 먼저 그 자신을 수양했고, 그 자신을 수양하고자 한 자는 먼저 그 생각을 채웠고, 그 생각을 채우고자 한 자는 먼저 그 앎을 지극하게 하였으니, 앎을 지극하게 함은 사물에 도달함에 있다.
사물이 도달된 뒤에 앎이 지극해지고, 앎이 지극해진 뒤에 생각이 채워지고, 생각이 채워진 뒤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 자신이 수양되고, 자신이 수양된 뒤에 집안이 동등하게 대해지고, 집안이 동등하게 대해진 뒤에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나라가 잘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평안하게 된다.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脩身爲本.
천자로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다 자신을 수양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其本亂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 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
그 근본이 어지러운데 말단이 잘 다스려지는 경우는 없으며, 그 후하게 대할 자에게 박하게 대하고 박하게 대할 자에게 후하게 대하는 경우는 있지 않았다.
≪대학≫이란 책(의 내용)은 옛날 대학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던 방법이다. 하늘이 백성을 내리고부터 인의예지의 본성을 주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 기질을 받은 게 간혹 같지 못하니 이 때문에 모두 자기의 본성이 가진 것을 알아서 온전하게 함이 있지 못한 것이다. 일단 총명하고 지혜로워 자기의 본성을 극진히 할 수 있는 자가 그 사이에서 나오면 하늘이 반드시 그에게 명하여 수많은 백성의 임금이자 스승으로 삼고 그에게 그들(백성)을 다스리고 가르치도록 시켜서 본성을 회복시켰다. 이는 복희, 신농, 황제, 요임금, 순임금이 하늘의 뜻을 이어 표준을 세운 까닭이고 사도(교육 담당자)의 직책과 전악(음악 담당자)의 관직이 설치된 이유이다.
세 왕조(하나라, 상나라, 주나라)가 융성했을 때 그 법이 점점 갖추어졌으니 그런 뒤에 왕궁, 국도에서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학교가 없는 곳이 없게 되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여덟 살이 되면 왕공(王公)부터 아래로는 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에 들어갔고 (소학에서는) 물을 뿌리고 빗자루질 하며, 대답하고 접대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범절과 예의, 음악, 궁술, 승마, 서법, 산수의 문장을 가르쳤으며, 그들(학생)이 열다섯 살이 되면 천자의 맏아들, 여러 작은 아들부터 공, 경, 대부, 원사의 본처가 낳은 아들과 일반 백성의 준수한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에서는) 이치를 깊이 헤아리고, 마음을 바르게 하고,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도를 가르쳤다. 이것은 또 학교의 가르침에 있어서 대학, 소학의 절목이 나뉜 까닭이다.
학교의 설치는 그 광대함이 이와 같았고 그(학생)들을 가르치는 기술은 그 차례, 절목의 상세함이 또한 이와 같았는데, 교육하는 방법은 또 모두 군주가 몸소 행하여 마음으로 얻은 결과에 뿌리를 두었기에 백성이 날마다 지키는 한결같은 윤리의 밖에서 구할 필요가 없었으니 이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람들 가운데 배우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곳(학교)에서 배운 자들은 그들의 성분이 본래 가진 것과 직분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알아 각각 힘써서 그들의 힘을 다함이 없지 않았다. 이는 옛날 융성할 때 정치는 위에서 높고 풍속은 아래에서 아름다워 후대 사람들이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까닭이다.
주나라가 쇠하게 되자 현명하고 성스러운 군주가 나타나지 않고 학교의 정사가 닦이지 않아 교화는 차츰 사라져갔고 풍속은 무너져 내렸다. 이때는 공자 같은 성인이 계셨으나 임금, 스승의 자리를 얻어서 정치, 교육을 행할 수 없으셨니 이에 홀로 선왕의 법을 취해 외우고 전하여서 후대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곡례><소의><내칙><제자직> 같은 여러 편은 본래 소학의 곁가지이고 끝자락이며 이 편(대학)은 소학의 성공에 기초를 두어 대학의 밝은 법을 드러내었으니 밖으로는 그 규모의 큼을 지극히 함이 있고 안으로는 그 절목의 상세함을 극진히 함이 있다. 3천 명의 무리 가운데 그 말씀을 듣지 않은 이가 없었겠지만 증씨(曾參과 그의 문인들)가 전한 것만이 홀로 본래의 취지를 파악하였으니 이에 (증삼과 문인들이) 경문의 뜻을 전하는 글을 지어 그 의미를 내보였다. 맹 선생께서 별세하시자 전한 것이 사라졌으니 책은 비록 있었으나 이해한 자는 드물었다.
이때로부터 변변치 못한 유학자들의 경전을 암송하고 문장을 꾸미는 학습은 그 공이 소학보다 배가 되었으나 쓸모가 없었고 이단의 허무, 열반에 대한 가르침은 그 높이가 대학보다 높았으나 알맹이가 없었다. 기타 권모술수에 능한 지략가들의 온갖 방법으로 공명을 이루는 설, 그리고 여러 사상 및 갖은 기예를 주장하는 유파들의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며 인의를 막아버리는 수단이 또 너저분하게 그 사이에서 섞여 나왔다. 이는 군자(통치자)가 불행하게도 큰 도의 요지를 들을 수 없게 만들었고 소인(평민)이 불행하게도 지극한 통치의 혜택을 입을 수 없게 만들었으니 어두컴컴하며 꽉 막힌 상황이 반복되고 오래도록 깊어져 오대십국이 쇠하게 되자 (도가) 무너지고 어지러워짐이 극심하였다.
천운은 순환하여 가면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 송나라의 덕이 융성하여 정치와 교화가 아름답고 밝아졌다. 이에 하남 정씨 두 선생(程顥와 程頤)이 나오시어 맹씨(孟軻와 그의 문인들)가 전한 것을 이었다. 실상 처음으로 이 편(≪大學≫)을 소중히 여기고 신뢰하여 겉으로 드러내시고 또 이를 위해 그 책에 편차를 매겨 깃들어 있는 의미를 밝히셨으니 그런 뒤에 옛날 대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던 법과 성경(聖經), 현전(賢傳)의 뜻이 찬란하게 다시 세상에 밝아졌다. 비록 나(熹)의 영리하지 못한 자질로 (공부)했지만 다행히 마음으로 본받았고 참여하여 들었다. 다만 그 책은 여전히 (내용이) 많이 흩어져 없어진 상태이니 이 때문에 (나는) 스스로의 볼품없음을 잊고 그것(없어진 부분)을 뽑아 모았으며 간간이 삼가 나의 의견을 붙여 빠지고 생략된 부분을 보충하였으니 이로써 후대의 군자를 기다리겠다. 분수에 지나쳐 죄를 피할 곳이 없음을 지극히 잘 알고 있지만 국가가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려는 의도와 배우는 자들이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법에 있어서는 작은 도움이 반드시 없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