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皇1)初, 有儀同2)劉臻等八人3)同詣4)法言5)門宿. 夜永酒闌6), 論及音韻. 以<古>今聲調7)旣自有別, 諸家取捨亦復不同. 吳楚8)則時傷輕淺, 燕趙9)則多傷重濁; 秦隴10)則去聲爲入, 梁益11)則平聲似去. 又支·脂, 魚·虞共爲一韻12), 先·仙, 尤·侯俱論是切. 欲廣文路, 自可淸濁皆通; 若賞知音, 卽須輕重有異.

옛날 개황 초에 의동 유진 등 8인이 나의 집에 모여 묵었다. 밤은 길고 술자리가 파할 무렵 이야기가 음운으로 이어졌다. 옛날과 지금의 성조에 이미 구별이 생겼고, 여러 학자들이 취하고 버리는 것도 같지 않다. 남방의 오·초 지역은 때로 심하게 가볍고 얕으며, 북방의 연·조 지역은 지나치게 무겁고 탁한 음이 많다. 서북의 진·농 지역은 거성을 입성으로 하고, 서남의 양·익 지역은 평성이 거성과 비슷하다. 또 支운과 脂운, 魚운과 虞운을 모두 하나의 운으로 하고, 先운과 仙운, 尤운과 侯운을 모두 같은 반절하자로 한다. 시문 창작의 길을 넓히고자 한다면 청음과 탁음을 통하게 할 수도 있지만, 만약 음을 제대로 감상하고 이해하려면 반드시 가볍고 무거움에 차이가 있어야 한다.

 

呂靜≪韻集≫·夏侯詠13)≪韻略≫·陽休之≪韻略≫·周思言≪音韻≫·李季節≪音譜≫·杜臺卿≪韻略≫等各有乖互. 江東14)取韻與河北15)復殊. 因論南北是非, 古今通塞, 欲更捃16)選精切, 除消疏緩. 17)·18)多所決定. 魏著作19)法言曰: “向來論難, 疑處悉盡, 何不隨口記之? 我輩數人, 定則定矣.” 法言卽燭下握筆, 略記綱紀. 博問英辯20), 殆得精華. 於是更涉餘學, 兼從薄宦, 十數年間, 不遑修集.

여정의 ≪운집≫, 하후영의 ≪운략≫, 양휴지의 ≪운략≫, 이계절의 ≪음보≫, 두대경의 ≪운략≫ 등이 각각 서로 다르고, 강동 지역에서 운을 취한 것이 하북 지역과 또 다르다. 그래서 남방과 북방의 옳고 그름(지역 차이), 옛날과 지금의 통하고 막힘(시대 차이)을 논하고 정밀하고 적절한 것을 더 선택하려 했고, 엉성하고 느슨한 것은 제거하고자 했다. 소해와 안지추가 결정한 것이 많다. 위언연이 나에게 말하길 “저번부터 논란이 된 것들 가운데 의심스러운 부분이 다 없어졌으니 어째서 말한 대로 옮겨 적지 않소? 우리 몇 사람이 정하면 정해지는 것이오.” 하였다. 나는 곧 등불 아래에서 붓을 잡아 대강을 간략히 기록하였다. 후에 널리 묻고 치밀하게 변론하여 거의 정화를 얻었다. 그리고 다른 학문도 섭렵하고 말단 관리 일도 겸하여 하느라 십몇 년간 정리하고 모을 겨를이 없었다.

 

今返初服21), 私訓諸子弟, 凡有文藻, 卽須明聲韻. 屛居山野, 交遊阻絶, 疑惑之所, 質問無從. 亡者則生死路殊22), 空懷可作之歎; 存者則貴賤禮隔23), 以報絶交之旨. 遂取諸家音韻, 古今字書, 以前所記者, 定之爲≪切韻≫五卷. 剖析毫釐24), 分別黍累25). 何煩泣玉26), 未得縣金27). 藏之名山28), 昔怪馬遷之言大; 持以蓋醬29), 今歎揚雄之口吃. 非是小子專輒, 乃述群賢遺意, 寧敢施行人世? 直欲不出戶庭. 于時歲次辛酉, 大隋仁壽30)元年.

이제 처음 신분으로 돌아와 개인적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되 무릇 문장의 멋이 있으려면 반드시 성운에 밝아야 한다고 했다. 산과 들에 묻혀 살다 보니 사람들과 교유가 끊겨 의혹스러운 부분이 있어도 질문할 곳이 없었다. 죽은 자는 생사의 길이 다르니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한탄을 헛되이 품어볼 뿐이고, 남은 자는 귀천에 따라 예법에 간격이 생기니 절교할 뜻을 전했다. 드디어 여러 학자들의 운서와 옛날과 지금의 자서를 취하고 이전에 기록한 것으로 정하여 ≪절운≫ 다섯 권을 만들었으니, 쪼갠 것이 정밀하고 분별한 것이 세밀하다. 초나라 화씨가 옥 때문에 눈물 흘린 것을 어찌 번거롭다 하겠으며, 여불위가 여씨춘추를 첨삭할 수 있는 자에게 주겠다고 걸어둔 금은 아무도 얻지 못하였다. ≪사기≫를 명산에 감추어 놓겠다는 사마천의 큰소리를 옛날에는 괴이하게 여겼는데, ≪법언≫을 후세 사람들이 장독 뚜껑으로 쓸 것이라는 유흠의 놀림에 양웅이 대꾸하지 않은 것을 지금 탄식한다. 볼품없는 내가 마음대로 지은 것이 아니고, 여러 현명한 분들이 남기신 뜻을 서술한 것이다. 어찌 감히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겠는가? 다만 내 집안을 나가지 않길 바랄 뿐이다. 때는 신유년 대수 인수 원년이다.


1) 開皇(개황): 수나라 문제의 첫 번째 연호(581-600). 개황 초는 581년이나 582년을 가리킨다.

2) 儀同(의동): 관직 이름.

3) 八人(팔인): 유진(劉臻)부터 안지추(之推), 노사도(盧思道), 이약(李若), 소해(蕭該), 신덕원(辛德源), 설도형(薛道衡), 위언연(魏彥淵)까지 여덟 사람.

4) 詣(예): 다다르다.

5) 法言(법언): 육법언(陸法言)을 가리킨다. 法言은 자(字)이고, 이름은 ≪간류보결절운(刊謬補缺切韻)≫에는 詞로, ≪구상서(舊唐書)≫에는 慈로 기록되어 있다.

6) 闌(란): 다하다, 저물다.

7) 聲調(성조): 성운 혹은 음운.

8) 吳楚(오초): 남방 지역.

9) 燕趙(연조): 북방 지역.

10) 秦隴(진농): 산시(陝西)와 간쑤(甘肅) 일대, 즉 서북 지역.

11) 梁益(양익): 쓰촨(四川) 일대, 즉 서남 지역.

12) ≪안씨가훈(顔氏家訓)≫<음사(音辭)> "북방인들은 庶를 戍라고 발음하고, 如를 儒라고 발음하고, 紫를 姊라고 발음한다(北人以庶戍, 以如儒, 以紫爲姊)."

13) 夏侯詠(하후영): 詠을 該로 쓴 판본도 있다.

14) 江東(강동): 장강 동쪽, 즉 남방 지역.

15) 河北(하북): 황하 북쪽, 즉 북방 지역.

16) 捃(군): 가려내다.

17) 蕭(소): 소해를 가리킨다.

18) 顔(안): 안지추를 가리킨다.

19) 魏著作(위저작): 위언연을 가리킨다. 著作은 관직 이름으로 著作郞과 같다.

20) 英辯(영변): 치밀하게 변론하다.

21) 初服(초복): 관직이 없던 시절에 입던 의복.

22) 위에 언급된 8인 중에 유진, 소해, 안지추, 위언연, 노사도는 당시에 이미 졸하였다. 이약, 신덕원의 생사는 불분명하다.

23) 당시에 생존해 있었던 설도형에 대해 쓴 구절로 보인다.

24) 毫釐(호리): 매우 작은 단위. 10호가 1리.

25) 黍累(서루): 매우 작은 단위. 10서가 1루.

26) 泣玉(읍옥): ≪한비자≫<화씨>에 보인다.

27) 縣金(현금): ≪사기≫<여불위전>에 보인다.

28) 藏之名山(장지명산): ≪사기≫<태사공자서>에 보인다.

29) 持以蓋醬(지이개장): ≪한서≫<양웅전>에 보인다.

30) 仁壽(인수): 수나라 문제의 두 번째 연호(601-604). 원년은 601년.

절운 서


모성재에서 월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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