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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간은 2015년 안후이대학이 입수한 초나라 죽간이다. 안후이대학전국죽서(安徽大學藏戰國竹簡)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출판, 흔히 줄여서 안대간 혹은 안휘간이라고 부른다. 시경과 초나라 역사 관련 문헌이 주요한 내용이다.
【번역】
① 중니께서 말씀하셨다. "얘들아, 너희가 나갈 때는
② 열 개의 손이 너희를 가리키며 열 개의 눈이 너희를 보니 너희는 어찌 감히 불선한 짓을 하겠느냐?
③ 대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 (생각을) 삼간다."
【소결】
≪예기·대학≫에는 "曾子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라는 문장이 보이며 또 "故君子必愼其獨也"라는 문장이 보인다. ≪예기≫에는 증자의 말로 되어 있지만 죽간에는 중니, 즉 공자의 말로 되어 있다.
【번역】
① 중니께서 말씀하셨다. "안평중은 사람들과 사귀기를 잘하는구나!
②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더라도 오래도록 공경하였다."
【소결】
≪논어≫에는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라는 문장이 보인다. 흔히 이 문장은 "안평중은 사람들과 사귀기를 잘하였으니 오랫동안 지냈더라도 (안평중이) 그들(사람들)을 공경했다."로 해석한다. 그런데 魏著作郞韓顯宗墓誌에는 "善與人交, 人亦久而敬焉"이라고 되어 있으며 만약 이를 따른다면 "안평중은 사람들과 사귀기를 잘하였으니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도) 오랫동안 그(안평중)를 공경했다."라고 이해해야 한다. 죽간의 번역은 통상적인 해석을 따랐으나 만약 후자의 설을 따른다면 "안평중은 사람들과 사귀기를 잘하는구나!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더라도 (사람들이) 오래도록 (안평중을) 공경하였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번역】
① 중니께서 말씀하셨다.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국을
②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그는 그 즐거움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니
③ 나는 안회만 못하다."
【소결】
≪논어≫에는 "子曰: '賢哉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는 문장이 보인다. 또 "子謂子貢曰: '女與回也孰愈?' 對曰: '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弗如也'"라는 문장도 보이는데 "吾與女弗如也"를 하안의 ≪논어집해≫에서는 "나와 너 모두 그(안회)만 못하다"라고 해석하였으며 주희의 ≪논어집주≫에서는 "나는 네가 그(안회)만 못함을 인정한다"라고 해석하였는데, 죽간을 참고한다면 ≪집해≫의 해석에 힘이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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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주이(王家咀) 묘지는 중국 후베이(湖北)성 징저우(荆州)시 징저우(荆州)구 지난(紀南)진 홍성(洪聖)촌에 위치한다. 징저우박물관은 2019년부터 2021년까지 발굴을 진행하였으며 2021년 6월 M798호 전국시대 초나라 무덤에서 청동기, 칠목기, 죽간이 출토되었다.
출토죽간은 약 3,200매이다. 내용은 3종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공자왈(孔子曰)≫로 제목을 정할 예정이다. 주제는 ≪논어≫와 매우 유사하다. 전문은 여러 편으로 나뉘는데, 일부 간은 뒷면에 “居川上之下”, “智(知)之樂之”, “可智(知)也之下” 등과 같이 편제가 있으나 모두 통행본 ≪논어≫에 보이지 않는다. 편 중에 장을 나누었는데, 孔子曰로 시작하는 장이 많다. 일부 내용이 비교적 긴 장은 다시 약간의 절로 나누었는데 분장과 분절은 모두 "■"표를 사용하였다. 제목은 발견되지 않았다. 통행본 ≪논어≫와 구별하고 학계에서 인용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 정리팀은 ≪공자왈(孔子曰)≫로 제목을 정할 예정이다.
둘째는 ≪시경≫으로 내용은 통행본의 ≪주남≫, ≪소남≫, ≪패풍≫, ≪용풍≫, ≪위풍≫, ≪왕풍≫, ≪정풍≫, ≪제풍≫, ≪위풍≫, ≪당풍≫, ≪진풍(秦風)≫, ≪진풍(陳風)≫, ≪회풍≫, ≪조풍≫, ≪빈풍≫의 일부 시편과 대독(對讀)할 수 있다.
셋째는 숫자, 천간 및 기타 소량의 필획이 간단한 문자의 서로 다른 배열과 조합으로 그 성질은 더 진전된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
본문에서는 지금까지 공개된 ≪공자왈(孔子曰)≫의 일부에 대해 초보적인 한국어 역주를 달고 전래문헌 ≪논어≫≪맹자≫와 대독(對讀)을 진행한다.
【주석】
※ ≪논어집주≫<선진>16장, ≪맹자집주≫<이루上>14장과 대독한다.
[1] 자로(子路). 공자의 제자. 성은 仲, 이름은 由, 字가 자로이다.
[2] 자로의 이름.
[3] 문맥 상 非가 자연스럽다. 후속 연구를 기다린다.
【번역】
① 자로가 계씨의 가신이 되었다.
② 공자가 말하였다. "중유가 계씨의 가신이 되었는데, 그 마음씨를 고칠 수 없었으며 세금이 다른 날의 배가 되었다.
③ 중유는 나의 무리가 아니다. 얘들아, 북을 울려 그를 꾸짖는 것이 옳다."
【소결】
≪논어≫에는 "季氏富於周公, 而求也為之聚斂而附益之. 子曰: '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 可也'"라는 문장이 보이며, ≪맹자≫에는 "孟子曰: '求也為季氏宰, 無能改於其德, 而賦粟倍他日. 孔子曰: 「求非我徒也, 小子鳴鼓而攻之可也」 由此觀之, 君不行仁政而富之, 皆棄於孔子者也"라는 문장이 보인다. 두 문장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나 ≪맹자≫의 내용이 죽간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다만 ≪맹자≫에는 "無能改於其德, 而賦粟倍他日"가 사건 묘사(narrative)로 나타나는데 반해 죽간에서는 공자의 말(dialogue)로 나타난다.
또 주목할 만한 점은 통행본에는 계씨의 가신이 되어 세금을 더 많이 거둔 주체가 求, 즉 염유인데 죽간본에는 由, 즉 자로이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 적어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첫째는 통행본이 수정된 것이고 죽간본이 원본에 가깝다는 것이며 둘째는 죽간본이 수정된 것이고 통행본이 오히려 원본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염유는 염자(冉子)라고 일컬어졌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그는 계씨의 재산을 늘려주는 잘못을 범하였기 때문에 공자로부터 꾸지람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치부를 감추기 위해 기록을 수정했을 동기가 있다. 섣부른 추측이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 죽간은 염유의 학파에서 전수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현재로서는 죽간 자체가 정식으로 발표되지 않았고, 출토문헌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후속 연구를 기다린다.
소개 해혼후(海昏侯)의 성은 유(劉)이고, 이름은 하(賀)이다. 한나라 무제(武帝)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무제의 서자인 창읍애왕(昌邑哀王) 유박(劉髆)이다. 왕위에 오른 지 27일 만에 폐위되었기 때문에 폐제(廢帝)라고 불리며 시호나 묘호는 없다. 江西省文物考古硏究所는 2011년 4월에 발굴이 시작하였으며 그후 주목할 만한 발견이 매우 많았다.
2015년 8월에는 약 5,200여 매의 간독(簡牘) 자료를 발견하였다. 그 내용은 《詩》부터 《禮》, 《春秋》, 《論語》, 《孝經》, 심지어는 한나라 때 보드게임의 일종인 《六博》에 이르기까지 매우 풍부하고 다양하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죽간의 보존 상태가 좋지 못해서 보강 작업을 한 후에야 죽간을 떼어내고 탈색을 해서 정식으로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죽간 발견에는 하나의 일화가 전해진다. 발굴 당시에는 죽간이 큰 진흙더미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발굴자들은 당연히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처리하기 전에 전문가들에게 문의를 해보니 그 속에 죽간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들은 진흙더미를 보존하기로 결정했고 이후에 진흙 속에서 죽간(이하 해혼한간)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해혼한간 《논어》는 현재 500여 매가 확인되며 대부분 잔간(殘簡)이다. 소수의 완전한 간을 통해서 한 간에 약 24자가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부터 현재까지 일부 공개된 해혼한간 《논어》를 살펴보겠다.
〈옹야(雍也)〉
【주석】
※ 《집주》〈옹야〉 1장에 해당한다.
[1] 통행본에는 也가 없다.
【번역】
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옹은 남면시킬 만하다.”
【소결】
특이사항 없음.
【주석】
※ 《집주》〈옹야〉 12장에 해당한다.
[1] 王楚寧, 張予正은 爾로 예정(隷定)했으나 자형 상 耳에 가까워 보인다. 후속 발표와 연구를 기다린다.
【번역】
① 자유가 무성의 읍재가 되었는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인재를 얻었느냐......
【소결】
특이사항 없음.
【주석】
※ 《집주》〈옹야〉 21장에 해당한다.
[A] 통행본에는 智가 知로 되어 있다. 해혼본에서는 智로 知와 智를 모두 기록하고 있다.
【번역】
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하며 지자는 동적이고 인......
【소결】
특이사항 없음.
〈선진(先進)〉
【주석】
※ 《집주》〈선진〉 25장에 해당한다.
[1] “冠者五六人”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이 명백하다.
[2] 陳侃理는 頌으로 읽고 ‘낭송하다’로 풀이했다.
[3] 왼쪽이 보이지 않으나 斤 아래의 긴 가로획으로 추정컨대 近일 가능성이 높으며 沂로 읽을 수 있다.
[4] 陳侃理는 諷으로 읽고 ‘노래하다’로 풀이했다.
[5] 통행본의 舞雩에 해당한다.
[6] 적외선 사진을 통해 왼쪽이 氵편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오른쪽에 묻은 오물을 제거한 뒤 丙 형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丙을 성부로 하는 글자는 永을 성부로 하는 글자와 통가 관계가 성립한다. 따라서 통행본을 따라 詠으로 읽을 수 있다. 陳侃理는 氵편방에 주목해 滂으로 읽었다. 丙을 성부로 하는 글자는 旁을 성부로 하는 글자와도 역시 통가 관계가 성립한다
[7] 䢜는 歸의 이체자이다. 陳侃理는 饋로 읽고 ‘술과 음식을 바치다’로 풀이했다. 饋로 읽을 수도 있지만 문맥 상 글자 그대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8] 箴은 잔간과 철합(綴合)한 뒤에 모양이 분명해졌다. 통행본에는 點으로 되어 있다. 《사기》〈중니제자열전〉에서는 蒧으로 되어 있다. 모두 曾晳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9] “三子者出, 曾晳後.”로 이어진다. 해당 부분의 죽간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번역】
① ......동자 예닐곱 명과 기수에서 (글을) 낭송하고 무우에서 노래하여 비가 내리게 하고서 돌아오겠습니다.”
② 공자께서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나는 점에게 동의한다.”
③ 세......
【소결】
이 장은 역대로 의미 해석에 논란이 많았다. 하안(何晏)의 《논어집해》에서는 포함(包咸)의 설을 인용하여 “莫(暮)春은 계춘(季春) 3월이다. 春服旣成은 홑옷이나 겹옷을 입을 때이다. 나는 (冠者) 5, 6인과 동자(童子) 6, 7인을 얻어 기수 가에서 목욕하고 무우단 아래에서 서늘한 바람 쐬고서 선왕의 도를 노래하며 부자(夫子)의 문하로 돌아오고 싶다는 말이다.”라고 해석했다. 황간의 《논어의소》에서도 “산책하고 헤엄치고 노래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로써 후한 시기에는 이와 같은 해석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충은 《논형》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며 “주나라 4월은 정세(正歲, 하력) 2월이니 아직 추운데 어찌 목욕하고 바람에 몸을 말리겠는가? ”라고 지적했으며 浴을 涉의 뜻으로 해석했다. 채옹(蔡邕)의 《월령장구(月令章句)》에서는 “부정을 없애는 의식”으로 해석했다. 한유(韓愈)는 浴을 沿으로 고쳐서 해석하였다. 주희(朱熹)의 《집주》는 채옹의 말을 따랐으나, “한서 지리지에 온천이 있다고 했으니 이치 상 혹 그럴 듯하다.”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아마 왕충이 지적한 것과 같이 야외에서 목욕할 정도로 온난한 시기가 아니라는 점을 의식한 것 같다. 명나라, 청나라 때는 대부분 주희의 설을 따랐다. 陳侃理는 해혼본의 容을 頌으로 읽는데 容과 公은 상고음이 유사하여 통용될 수 있다. 또 해혼한간 《詩》에는 魯容, 周容이라는 말이 보이는데 각각 魯頌, 周頌을 의미하며 容을 頌으로 읽을 수 있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는 風도 諷으로 읽는데 이는 왕충 등이 이미 그과 같이 주장한 일이 있다. 의 경우 통행본을 따라 詠으로 읽을 수 있지만 陳侃理는 이 글자가 水를 의미 요소로 하는 점과 라는 지명의 의미를 고려하여 滂으로 읽었다. 필자는 이 의견에 매우 동의한다. 그러나 䢜를 饋로 읽는 부분에 대해서는 글자 그대로 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堯)〉
【주석】
※ 《집주》〈요왈〉 3장에 해당한다.
【번역】
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가 없으며,
② 예제를 알지 못하면 설 수가 없으며,
③ 언어를 알지 못하면 ......없다.”
【소결】
특이사항 없음.
〈지도(智道)〉
【주석】
※ 통행본에 보이지 않는다. 하안은 “제나라 《논어》는 〈문왕(問王)〉, 〈지도(知道)〉편이 있으니 노나라 《논어》보다 2편이 많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죽간은 그 〈지도〉편의 수장(首章)으로 추정된다. 죽간의 배면에 智道 두 글자가 있다는 점, 첫 장의 (孔)子(曰) 다음 단어로 편제를 삼는 것이 논어의 관행인 점을 고려하면 매우 합당한 추정이다.
[A] 王楚寧은 昜을 易으로 읽었다. 두 글자는 자형이 비슷해서 자주 혼용된다. 진한 시대 간독 자료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龐光華, 周飈, 吳珺은 昜=을 蕩蕩으로 읽고 ‘넓고 평탄한 모습’으로 풀이했다. 필자는 王楚寧의 의견에 동의한다.
【번역】
① 공자께서는 도가 쉽다는 것을 아셨으니 쉽다 쉽다 하신 지가 여러 날이었다.
②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이 도의 아름다움이여, 아무도 이를 쓰지 못하는구나.”
【소결】
이 죽간의 내용은 肩水金關遺址에서 출토된 죽간에서도 일부 확인되며, 전래문헌 가운데 한시외전과 공자가어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보인다. 따라서 한대에 이미 널리 알려진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통행본의 “子曰: ‘誰能出不由戶? 何莫由斯道也?’”라는 문장(《집주》〈옹야〉15장)을 참고하여 이해할 것을 제안하며, 此道란 추정컨대 文武周公을 비롯한 先王之道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주석】
※ 역시 통행본에 보이지 않는다. 죽간 배면에 起智道廿一이라는 글자가 있기 때문에 〈지도〉편의 한 장으로 추정된다. 주된 내용은 후군과 무마자기라는 인물의 대화이다. 무마자기는 무마시(巫馬施)이며 통행본에는 단 한 차례만 등장한다(《집주》〈술이〉31장 참고).
[1]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陳侃理는 《사기》〈중니제자열전〉에 나오는 后處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고 했다.
[2] 후군의 이름이다. 어떻게 읽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후속 연구를 기다린다.
[3] 陳侃理는 寬과 施의 의미가 비슷하기 때문에 무마시와 동일인이라고 보았다.
【번역】
① 후군이 무마자기에게 물었다. “그 생물을 보고 나서 그 죽은 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을 군자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② (무마자기)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③ 후군이 말하였다.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④ 무마자관이 말하였다.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⑤ 후군이 물러나 생각을 여러 달 하고서는 말하였다. “저도 (그 생물을 보고 나서는 그 죽은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소결】
이 장의 내용은 《맹자》〈양혜왕上〉에 보이는 “군자가 금수를 대하는 것은 그 삶을 보고 그 죽음을 보지 못하며 그 소리를 듣고 그 고기를 차마 먹지 못한다. 이 때문에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하는 것이다.”라는 말과 유사하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것으로 사료된다. 하나는 공자 제자들 사이에서 이미 맹자와 유사한 사상이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思孟學派의 인물 중 하나가 공자 제자의 말에 의탁해 새로 만든 내용이라는 것이다. 제현들의 고찰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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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나 고대사상사 분야의 새로운 경향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출토자료의 세기"가 될 것이다.1)
출토자료는 갑골 문자, 청동기 문자(금문), 백서(帛書), 죽간, 목간 등이 있다. 이번 게시글에서는 초나라 죽간, 줄여서 초간(楚簡)이라고 부르는 자료를 집중적으로 알아보겠다.
1. 곽점초간(郭店楚簡)
곽점초간은 1993년 중국 후난성(湖南省) 징먼시(荊門市) 궈뎬촌(郭店村, 곽점촌)에서 출토되었다. 이 무덤은 초나라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총 804매의 죽간이 함께 묻혀 있었다.
내용:
- 老子甲、乙、丙
- 太一生水
- 緇衣
- 魯穆公問子思
- 窮達以時
- 五行
- 唐虞之道
- 忠信之道
- 成之聞之
- 尊德義
- 性自命出
- 六德
2. 상박초간(上博楚簡)
상박초간은 1994년 상하이박물관 관장 마청위안(馬承源)이 홍콩공동품경매시장에서 구매한 것이다. 경매시장에 등장했다는 것은 이전에 도굴되었음을 의미한다. 상하이박물관장전국초죽서(上海博物館藏戰國楚竹書)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출판, 흔히 줄여서 상박초간이라고 부른다. 총1,200여 매의 죽간이 확인되었다.
청화간은 2008년 칭화대학 졸업생 자오웨이궈(趙偉國)가 해외 경매로 구매한 것이다. 도굴 후 해외로 유입된 것이 경매시장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칭화대학장전국죽서(淸華大學藏戰國竹書)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출판, 흔히 줄여서 청화간이라고 부른다. 총 2,388매의 죽간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