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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 용법 정리 (월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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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㞢

之는 止와 자원 및 어원 측면에서 동원 관계이다. 갑골문의 止는 사람의 발을 상형하였으며 본래 의미는 {발}이었다. 止는 고대에 {가다}, {발}, {멈추다} 등의 어휘를 나타내었다. 어휘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들은 인신(引伸), 즉 파생 관계이다.

zhī {가다}는 성조 변화로 zhǐ {발(←가는 것)}라는 어휘를 파생하였다. zhī와 zhǐ의 관계는 hán 含 {머금다}와  hàn 頷 {턱(←머금는 것)}, 혹은 dī 低 {낮다}와 dǐ 氐 {밑(←낮은 것)} 등의 관계와 동일하다.

또 발은 가만히 서 있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동사화되어 {머무르다}라는 어휘를 파생하였다. 그런데 한 글자에 여러 어휘가 대응되면 혼란이 생기기 때문에 문자를 분화시켜 {가다}는 之로, {발}은 足을 추가한 趾로 나타내었으며, 止는 {머무르다}라는 어휘만 담당하게 되었다. 

之는 止 아래 하나의 선을 그어 만든 글자이다. 본래 의미는 往 {가다}에 가깝다. 

이것을 지시사로 쓰는 것은 가차인데, 이미 복사(卜辭)에서 그 용법이 보이며 “之日”, “之夕”처럼 쓴다. 금문에도 史䛗𣪘에 “之朝夕”이라고 있다. “~의/~한” 용법은 주나라 금문에 이르러서 보이며 中方鼎에 “隹王命南宫, 伐反虎方之年”이라고 하였다.

1.1) 지시 대명사

현대 중국어로 這(이), 這個(이것), 他(그), 它(그것), 他們(그들)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어로는 him(그를), her(그녀를), it(그것을), them(그들을)으로 해석하며, 일본에서는 습관적으로 これ(이것)라고 해석한다.

갑골문에서 玆는 근칭대명사, 之는 원칭대명사이다. 수식어나 목적어로 사용된다.  

(1) 之1夕嚮甲子, 允翦.  《合》 6834正
그날 저녁, 다음 甲子일로 접어드는 시기에 과연 멸망시켰다

 

(2) 之1子于歸.  《詩‧周南‧桃夭》
이 아가씨 시집 가네.

 

(3) 之1二蟲又何知?  《莊子‧逍遙遊》
이 두 벌레가 더욱이 무엇을 알겠는가?

위와 같은 용례보다는 술어의 목적어로 사용된 之가 문헌에 더 많이 등장한다.

(4) ES學而時習之1, 不亦說(悅)乎?  《論語‧學而》
(사람이) 배우고 때에 맞게 그것을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5) 文王以民力爲臺爲沼, 而民歡樂之1.  《孟子‧梁惠王上》
문왕이 백성의 힘으로 누대를 만들고 연못을 만들었으나 백성들이 그것을 기뻐
하고 즐거워했다.

 

(6) 是以ES謂之1文也.  《論語‧公冶長》
이 때문에 (우리는) 그를 문(文)이라고 일컫는다.

 

1.2) 수식 구조
之는 수식어와 피수식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피수식어는 명사성 어휘이며, 수식어는 명사성일 수도 있고 동사성일 수도 있다. Pulleyblank에 따르면 수식 관계를 표시하는 之는 어원적으로 대명사 之와 연관되어 있다. 가령 “仁之木(인의 근본)”의 원래 의미는 “인, 그것의 근본”이고 “麟之足(기린의 발)”의 원래 의미는 “기린, 그것의 발”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之는 서주 시기에 이미 문법화되어 대명사의 뜻을 거의 잃었다.

“A之B”에서 A가 명사성일 때 “A의 B”라고 해석하며, A가 동사성일 때는 “A한 B”라고 해석해야 한다. A가 사람일 때는 소유를 나타낸다.

 

(7) ES道(導)千乘之2國.  《論語‧學而》
(어떤 사람이) 천승의 나라(=제후국)를 지도하다.

 

(8) 禮之2用, 和爲貴.  《論語‧學而》
예의 활용은 조화가 귀중하다.

 

(9) 賢聖之2君六七作.  《孟子‧公孫丑上》
현명하고 성스러운 군주 6~7인이 나타났다.

 

(10) 文王之2囿方七十里.  《孟子‧梁惠王下》
문왕의 동산은 사방 70리였다.

 

1.3) 비독립절
“주어之술어” 구조는 고대중국어의 동명사 구조(gerundive construction)이다. 之는 수식 구조를 만드는데, “주어之술어” 구조도 넓게 보면 수식 구조에 해당한다. 영어에서 동명사의 주어가 소유격을 취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일반적인 “A之B”는 B가 명사인데, 여기서는 B가 동명사이기 때문에 명사성과 동사성을 동시에 가진다. 동명사 구조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11) 故ES不登高山, 不知天之3高也; 不臨深谿, 不知地之3厚也.  《荀子‧勸學》
그러므로 (우리는) 높은 산에 오르지 않으면 하늘이 높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지 않으면 땅이 두텁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12) 夫子之3求之1也, 其諸異乎人之3求之1與(歟).  《論語‧學而》
선생이 그것(벼슬)을 구하신 것은 아마 다른 사람이 그것(벼슬)을 구하는 것과  
다르다.

 

(13) 夷狄之3有君,不如諸夏之3亡也.  《論語‧八佾》
이민족이 군주를 가지고 있는 것은 중화가 (군주를) 가지지 않은 것만 못하다.

 

(14) 君子之3至於斯也, 吾未嘗不得見也.  《論語‧八佾》
군자가 여기에 도착했을 때, 내가 일찍이 만나지 못한 적이 없다.

 

(15) 鳥之3將死, 其鳴也哀; 人之3將死, 其言也善.  《論語‧泰伯》
새가 장차 죽을 때 그 울음이 슬프며, 사람이 장차 죽을 때 그 말이 선하다.

 

(16) 臣之3失職, 常刑不赦.  《左傳‧昭公25年》
제가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 형법에서 용서 받지 못합니다.

 

1.4) 도치 구조
之는 도치 구조에 사용될 수 있다. 고대중국어는 술어-목적어 어순이 일반적이지만, 목적어와 술어 사이에 之나 是를 삽입함으로써 목적어를 술어 앞으로 도치시킬 수 있다. 之와 是가 나타내는 어휘는 동원어이다. 이러한 之에 대해서는 중복지시 대명사라는 설과 단순 도치 표지라는 설이 있다. 앞의 설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王力, 郭錫良 郭錫良, 李佐豊, 王寧 등이 있다. 이 가운데 郭錫良의 문법 분석을 인용한다.

이 유형의 목적어 전치는 목적어가 전치하는 동시에 목적어 뒤에 대체사 是나 之를 사용하여 중복지시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때에 是나 之도 동사 앞에 놓인다. (這一類賓語前置的特點是在賓語前置的同時,還要在賓語後面用代詞‘是’或‘之’復指一下,‘是’或‘之’也要放在動詞的前面。)

“是之謂”, “此之謂”는 고대중국어에서 자주 보이는 고정 형식으로 “這就叫做(이것은 ~라고 한다)”로 해석될 수 있지만 양자의 문법구조는 상이하다. “是之謂”, “此之謂”는 “謂是”, “謂此"의 목적어 전치이다. 직역하면 “叫它(그것을 ~라고 일컫는다)” 혹은 “把它叫做(그것을 일컬어 ~라고 한다)”이다. (‘是之謂’和‘此之謂’是古文中常見的凝固格式,雖然可以譯成‘這就叫做’,但兩者的語法結構很不相同,‘是之謂’和‘此之謂’是‘謂是’、‘謂此’的賓語前置(如果直譯,就是‘叫它’或‘把它叫做’)。)

 

(17) 寡君其罪之4恐.  《左傳‧昭公31年》
우리 임금이 그 죄를 두려워한다.


위의 문장에서 주어는 寡君이며 술어는 恐이다. 其罪는 恐의 전치된 목적어이며, 之는 其罪를 다시 지시한다. 직역하면 “우리 임금은 그 죄, 그것을 두려워한다”이지만 이와 같은 之는 이미 문법화되어 대명사의 뜻을 거의 잃었다. 이하 문장들도 동일한 구조이다.

 

(18) 吾以子爲異之4問, 曾由與求之4問.  《論語‧先進》
나는 그대가 다른 일을 물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저 중유와 염구를 묻는구나.

 

(19) 我且賢之4用, 能之4使, 勞之4論.  《韓非子‧外儲說左下》
나는 장차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고, 잘하는 사람을 부리고, 공로 있는 사람을 
평론할 것이다.

 

之 대신 是를 사용하기도 한다.

 

(20) ES將虢滅.  《左傳‧僖公5年》
(그가) 장차 괵나라를 멸할 것이다.

 

전치된 목적어 앞에 隹, 惟, 唯, 維 등을 추가하기도 한다. 강조를 위한 목적어 전치 구조는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고 목적어를 유일한 선택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구조이다.


(21) 父母其疾之4憂.  《論語‧爲政》
부모는 오직 그 병을 걱정하신다.

 

(22) ES聽.  《左傳‧宣公15年》
(저는) 오직 명을 듣겠습니다.

 

謂와 之의 문제는 비교적 복잡하다. 謂는 많은 경우 두 개의 목적어를 가지는데, “謂AB”는 “A를 B라고 일컫다” 혹은 “A를 B라고 부르다”로 해석된다. 이때 A를 대명사 之로 대체하면 “謂之B”가 된다. “雖ESi曰ESi未學, 吾必謂之i學矣”는 “비록 (그 사람i이) ‘(나i는)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i를 배운 사람이고 일컬을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술어 謂의 주어는 吾이며 목적어는 之와 學이고, 之는 ‘자신이 아직 배우지 못했다고 말한 사람’을 다시 지시한다. 이것은 첫 번째 목적어를 대명사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며 여전히 정상 어순에 속한다.

 

(23) ES天命之4謂性,率性之4謂道,修道之4謂敎.  《禮記‧中庸》  
(우리는) 하늘이 명한 것을 본성이라 일컫고,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일컫고, 도를 닦는 것을 교화라고 일컫는다.

 

위의 문장에서 술어 謂의 주어는 생략되어 있는데, 화자 자신 혹은 일반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天命은 謂의 전치된 목적어 A이고, 之는 天命을 다시 지시한다. 性은 謂의 두 번째 목적어 B이며 정상적인 위치에 있다. 정상 어순에서는“ES謂天命性”이다. “A之謂B”는 매우 자주 사용되며 A 자리에 대명사가 오기도 한다.

 

(24) ES此之4謂絜矩之2道.  《禮記‧大學》  
(우리는) 이것을 헤아리는 도(道)라고 일컫는다.

 

“此之謂”, “是之謂”는 하나의 고정된 형식이 되며, 두 번째 목적어를 가지지 않고 단독으로 하나의 절을 형성할 수 있다. 이때 謂는 “말하다”로 해석된다.

 

(25) 詩云: “ES如切如磋, 如琢如磨.” ES其斯之4謂與(歟)?  《論語‧學而》
시에 “(문채 나는 군자가) 자른 듯하고 간 듯하며, 쪼은 듯하고 간 듯하다”라고 
하니 (이 시는) 이것을 말한 것이겠지요.

 

(26) ES非此之4謂也.  《孟子‧公孫丑下》
(나는)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목적어가 의문사의 수식을 받을 때도 전치되며 이때 목적어와 술어 사이에는 之를 삽입한다. 목적어로 사용된 의문 대명사도 전치된다.

 

(27) 何難之4有?  《荀子‧宥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위 문장에서 술어는 有이며 소유가 아닌 존재를 표현하기 때문에 주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何難은 有의 전치된 목적어이며, 之는 何難을 다시 지시한다. 정상 어순의 평서문에서는 “有難(어려움이 있다)”이 되지만 의문사 何가 목적어 難을 수식함으로써 의문문이 되었기 때문에 도치가 발생했다. 의문문 도치는 선진(先秦) 시기 문헌에서 비교적 엄격한 규칙이다.

 

목적어로 사용된 之는 술어가 부정 부사의 수식을 받을 때 전치된다. 

 

(28) 未之1有也.  《論語‧學而》
그것은 아직까지 있지 않았다.

 

위 문장에서 술어는 有이며 소유가 아닌 존재를 표현하기 때문에 주어는 나타나지 않는다. 之는 有의 전치된 목적어이다. 정상 어순의 긍정문에서는 “有之也(그것이 있다)”가 되지만 부정 부사 未가 술어 有를 수식함으로써 부정문이 되었기 때문에 도치가 발생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치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정확한 과정을 알기는 어렵지만 추측은 해볼 수 있다. 《시경》을 비롯한 비교적 이른 시기의 문헌에서는 의문문이나 부정문이 아닌 일반적인 문장에서도 대명사 목적어가 술어 앞으로 도치되는 현상이 목격된다.

 

(29) ES濩.  《詩‧周南‧葛覃》
(내가) 이것을 베고 이것을 삶는다.

 

(30) 寡人問.  《左傳‧僖公4年》
과인이 이것을 묻는다.

 

王力 등 일부 학자는 원시 중국어는 대명사 목적어가 술어 앞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가능성까지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가설의 영역으로 갑골문보다 더 오래된 문헌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증명이 불가능하다. 정확한 연원은 모르지만 대명사 목적어는 비교적 어순이 자유로웠으며 이것은 고대중국어에 분명히 존재했던 현상이다. 반면 일반적인 목적어는 술어 뒤에 위치하는 것이 정상적인 어순이었기 때문에 강조 등을 위해 어순을 바꾸려면 특수한 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즉, 고대중국인들에게 “聽命”과 “是聽”은 수용 가능한(acceptable) 문장이지만 “*命聽”은 부자연스러운 문장이었기 때문에 命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是나 之로 중복지시하여 “唯命是聽(오직 명을 듣겠습니다)” 혹은 “唯命之從(오직 명을 따르겠습니다)” 등의 도치 구문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是와 之가 나타내는 어휘는 동원어이기 때문에 유사한 문법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Pulleyblank의 견해도 대략 이상의 분석과 일치한다. 이러한 是나 之를 일부 학자들은 대명사가 아닌 단순 도치 표지로 분석하는데 사실 사실 전자는 문법화의 기점에, 후자는 문법화의 종점에 주목한 것으로 본질적으로는 두 분석이 서로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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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漢和辭典(1)》

- 《漢語大詞典(1)》

- 김혁, 《<殷虛文字丙編> 061∼066譯註》

- Axel Schuessler, “ABC Etymological Dictionary of Old Chinese”

- Edwin Pulleyblank, “Outline of Classical Chinese Grammar”

- Paul Rouzer, “A New Practical Primer of Literary Chinese”

- 白川靜, 《字統》

- 郭錫良, 《古代漢語》

- 李佐豊, 《古代漢語語法學》

- 梅廣, 《上古漢語語法綱要》

- 裘錫圭, 《文字學槪要》

- 王力, 《古代漢語》

- 王寧, 《古代漢語》


https://youtu.be/ajCFcBWhLv0

모성재에서 월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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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음: 군신 천지지분이라. 존차귀언하며 비차천언하니 존귀지사귀천 비천지사존귀 천지지상경이며 고금지통의.

해석: 임금과 신하 하늘과 땅의 구분이다. (임금은) 높고도 귀하며 (신하는) 낮고도 천하니 존귀한 이가 비천한 이를 부리는 것 비천한 이가 존귀한 이를 섬기는 것 하늘과 땅의 한결같은 법칙이며 옛날과 지금의 통하는 의리이다.

- 동몽선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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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음: 대학지도 재명명덕하며 재친(신)민하며 재지어지선이니라.

해석: 대학의 방도 밝은 덕을 밝히는 것에 있으며 백성을 친하게(새롭게) 하는 것에 있으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 것에 있.

- 예기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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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음: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이면 불역군자호?

해석: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에 맞게 익히 역시 기쁘지 않겠는? 벗 먼 지방으로부터 오 역시 즐겁지 않겠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 역시 군자답지 않겠는?"

-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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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음: 임방 문례지본한대 자왈 대재이여! 예 여기사야 녕검이오 상 여기이야 녕척이니라.

해석: 임방 예의 근본을 묻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위대하구나, 질문이여! 예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요, 상은 쉽게 잘 처리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것이다."

- 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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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음: 맹자견양혜왕하신대 왕왈 수불원천리이래하시니 역장유이리오국호잇가? 맹자대왈 왕 하필왈리잇고? 역유인의이이의니이다.

해석: 맹자가 양나라 헤왕을 만나셨는데 왕이 말하길 "어르신께서 천리를 멀다고 여기지 않고 오셨으니 역시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할 것이 있으십니까?" 맹자가 대답하셨다. "왕 어째서 꼭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

-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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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음: 호전하실새 청이전유호리이다.

해석: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므로 청컨대 전쟁으로 비유하겠습니다.


독음: 병인기접이어든 기갑예병이주호대

해석: 병기와 칼날이 이미 부딪혔다면 갑옷을 버리고 병기를 끌면서 달아나


독음: 직불백보이언정 시역주야니이다.

해석: 다만 100걸음이 아닐 뿐이언정 이것도 달아난 것입니다.

- 맹자


https://youtu.be/s9wEC1tmr4I

모성재에서 월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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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 先是, 扶餘王解夫婁, 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立爲太子.

시조 동명성왕은 성이 고씨이고 휘는 주몽이다. 이보다 먼저 부여왕 해부루는 늙어서 자식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지내며 후사를 구하였다. 그는 모는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말이) 큰 돌을 보고 서로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서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자 어린 아이가 있었고 금색 개구리의 형상이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는 바로 하늘이 나에게 훌륭한 자손을 내려준 것이리라.” 곧 거두어 길렀고 이름을 금와라고 불렀다. 그가 장성하게 되자 태자로 세웠다. 

後其相阿蘭弗曰: “日者天降我曰: ‘將使吾子孫, 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腴宜五穀, 可都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 來都焉.

이후 그 재상 아란불이 말하였다. “일전에 하늘께서 저에게 내려와 말씀하시길 ‘장차 우리 자손을 시켜 여기에 나라를 세울 것이니 너희는 피하라. 동해 바닷가에 땅이 있는데 가섭원이라고 부른다. 토양이 기름져서 오곡을 기르기 마땅하니 도읍으로 삼을 만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저기로 옮겼으니 국호는 동부여였다. 그 옛 도읍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출신을 알지 못하며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칭하였고 그곳에 와서 도읍하였다. 

及解夫婁薨, 金蛙嗣位. 於是時, 得女子於大(太)白山南優渤水, 問之.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에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여자를 얻어 물어보았다.

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心山下, 鴨淥邊室中私之, 卽往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여자가) 말했다. “나는 하백의 딸로 이름은 유화인데 동생들과 나와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말하였고 나를 유혹해 웅심산 아래 압록 강변 집 안에서 사통하고는 곧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중매 없이(결혼하지 않고) 남을 따라갔다는 것을 꾸짖으시고 끝내 쫓아내 우발수에 지내게 하셨습니다.”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所炤(照),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炤(照)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棄之與犬豕, 皆不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男兒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嶷然異常, 自作弓矢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금와가 이상하게 여기고 (유화를) 집 안에 깊이 가두었는데 (유화는) 해에게 비추어졌고 몸을 이끌어 피하자 햇빛이 또 따라와 비추었다. 그로 인해 임신하여 하나의 알을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는 듯했다. 왕이 그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는데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 가운데에 버렸는데 소와 말이 피했다. 이후 들판에 버렸는데 새가 날개로 덮어주었다. 왕이 갈라버리고자 하였는데 깰 수 없었고 끝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미는 물건으로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한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으니 골격과 겉모습이 영특하였다. 나이 겨우 7세에 총명하고 남달랐으며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로 활 잘 쏘는 이를 주몽이라고 하므로 그것으로 이름하였다.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戲, 其伎能皆不及朱蒙. 其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其爲人也勇. 若不早圖, 恐有後患, 請除之.”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而减食令瘦, 駑者善養令肥.王以肥者自乘, 瘦者給朱蒙. 後獵于野, 以朱蒙善射, 與其矢小, 而朱蒙殪獸甚多. 王子及諸臣又謀殺之.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놀았으며 기예와 재주가 모두 주몽을 따라잡지 못하였다. 그 장자 대소가 왕에게 말하였다. “주몽은 사람이 낳은 것이 아니며 그 사람됨이 용감합니다.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제거하길 청합니다.”
왕이 듣지 않고 그(주몽)를 시켜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이 준수한 말을 알아보고 양식을 줄여 야위게 하였으며 노둔한 말은 잘 길러서 살찌게 하였다. 왕이 살찐 것은 스스로 타고 야윈 것은 주몽에게 주었다. 이후 들판에서 사냥하는데 주몽이 활을 잘 쏘므로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주몽이 쓰러뜨린 짐승은 매우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또 죽일 것을 도모했다.

朱蒙母陰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何往而不可. 與其遲留而受辱, 不若遠適以有爲.”朱蒙乃與鳥(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淲(㴲)水,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何(河)伯外孫.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魚鼈乃解, 追騎不得渡.

주몽의 어머니가 이를 몰래 알아채고 알렸다.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치려 한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를 간들 안 되겠느냐. 늦게까지 머물다가 나쁜 일을 당하는 것은 멀리 가서 업적을 세우는 것만 못하다.” 주몽이 이에 오이, 마리, 협보 세 사람과 동료가 되어 떠나가 엄사수에 이르렀는데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추격병에게 거리가 좁혀질까 두려워 강에게 알렸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 가는데 추격자들이 들이닥치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고 주몽은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이에 흩어져 추격하는 기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朱蒙行至毛屯谷,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주몽은 가서 모둔곡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 명은 삼베옷을 입었고, 한 명은 기운 옷을 입었고, 한 명은 물풀옷을 입고 있었다.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주몽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디쯤 사람인가? 무슨 성, 무슨 이름인가?”

麻衣者曰: “名再思.”

삼베옷을 입은 자가 말하였다. “이름이 재사입니다.”

衲衣者曰: “名武骨.”

기운 옷을 입은 자가 말하였다. “이름이 무골입니다.”

水藻衣者曰: “名默居.”

물풀옷을 입은 자가 말하였다. “이름이 묵거입니다.”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默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그리고 성씨를 말하지 않았다. 주몽이 재사에게 극씨 성을, 무골에게 중실씨 성을, 묵거에게 소실씨 성을 하사하고 곧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큰 명을 받들어 (나라의) 기틀을 열고자 하는데 마침 이 세 현자를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준 것이 아니겠는가.”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本川.

마침내 그 능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에 도착했다.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時朱蒙年二十二歲,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世二十一年, 甲申歲也.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盜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준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에 도읍하려 했는데 아직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고 다만 비류수 가에 여막을 엮어 지어 살았다. 국호는 고구려였고 이로 인해 고를 성씨로 삼았다. 이때 주몽은 나이가 22세였는데, 이는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이며,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인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이를 듣고 와서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그 땅은 말갈 부락과 이어져 있었는데 침략하는 도적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 마침내 물리치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王見沸流水中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往尋, 至沸流國. 其國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然不識吾子自何而來.”

왕이 비류수 안에 채소 잎이 따라 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아챘으니 사냥을 명목으로 하여 찾으러 가 비류국에 도착했다. 그 나라 왕 송양이 나와서 만나보고 말하였다. “과인은 바다 한 구석에 치우쳐 있어 일찍이 군자를 만나지 못하였소. 오늘 우연히 서로 만났으니 행운이 아니겠소? 그러나 친애하는 당신께서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지 못하오.”

答曰: “我是天帝子, 來都於某所.”

(왕이) 답하였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어떤 곳에서 와서 도읍하였소.”

松讓曰: “我累世爲王. 地小不足容兩主. 君立都日淺, 爲我附庸可乎.”

송양이 말하였다. “나는 여러 세대 동안 왕을 하였소. 땅이 작아서 두 명의 군주를 들이기엔 부족하오. 임금께서 도읍한 일수가 적으니 나의 부용이 되면 괜찮을 것이오.”

王忿其言, 因與之鬪辯, 亦相射以校(較)藝,  松讓不能抗.

왕이 그 말에 분노하여 이로 인해 그와 함께 말싸움을 하였고 또 서로 사격으로 재예를 비교하였는데 송양이 대항할 수 없었다.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2년 여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갖고 항복해 왔으니 그 땅을 다물도라고 하고 송양을 분봉해 군주로 삼았다. 고구려 언어로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고 하므로 그로써 이름한 것이다.

三年, 春三月, 黃龍見於鶻嶺. 秋七月, 慶雲見鶻嶺南, 其色靑赤.

3년 봄 3월에 누런 용이 골령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경사스러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색이 푸르고 붉었다.

四年, 夏四月, 雲霧四起, 人不辨色七日. 秋七月, 營作城郭·宮室.

4년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7일 동안 사람들이 빛깔을 구별하지 못했다.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六年, 秋八月, 神雀集宮庭. 冬十月, 王命烏伊·扶芬奴, 伐大(太)白山東南荇人國, 取其地爲城邑.

6년 가을 8월 신령스러운 참새가 궁 뜰에 모였다. 겨울 10월 왕이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 행인국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성읍으로 만들었다.

十年, 秋九月, 鸞集於王臺. 冬十一月, 王命扶尉猒, 伐北沃沮滅之, 以其地爲城邑.

10년 가을 9월에 난새가 왕의 누대에 모였다. 겨을 11월 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성읍으로 만들었다.  

十四年,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 以大(太)后禮葬之, 遂立神廟. 冬十月, 遣使扶餘饋方物, 以報其德.

14년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고 그 왕 금와가 태후의 예법으로 장례 지냈으며 마침내 신묘를 세웠다. 겨울 10월에 부여에 사신을 보내 지방 토산물을 보내서 그 덕에 보답하였다.

十九年, 夏四月, 王子類利自扶餘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大(太)子.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19년 여름 4월에 왕자 유리가 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쳐 왔으니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세웠다. 가을 9월 왕이 승하하였으니 그때 나이는 40세였다. 용산에 장례 지냈으며 호는 동명성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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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휘는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인 갑자년 4월 병진일에 즉위하였고 칭호는 거서간이었다. 그때 나이는 13세였고 국호는 서나벌이었다.

先是, 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觜山珍支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이보다 먼저, 조선 유민들이 산과 계곡의 사이에 나누어 살며 여섯 마을을 만들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 둘째는 돌산 고허촌, 셋째는 취산 진지촌, 넷째는 무산 대수촌,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이니 이것이 진한 6부이다.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歳, 岐嶷然 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辰言王.

고허촌 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 수풀 사이에 말이 꿇어앉아 우는 일이 있었다. 곧 가서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만 있었는데 갈라보니 어린 아이가 거기서 나왔다. 곧 받아서 길렀는데 10여 세가 되자 총명하고 빨리 장성하였다. 6부 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이하므로 추존하였으니 이에 이르러 옹립하여 임금으로 삼았다. 진 사람들은 박을 ‘박’이라고 부르는데 처음에 큰 알이 박과 같았으므로 박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 언어로 왕이다.

四年, 夏四月辛丑朔, 日有食之.

4년 여름 4월 신축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五年, 春正月, 龍見於閼英井. 右脇誕生女兒, 老嫗見而異之, 收養之. 以井名名之. 及長有德容. 始祖聞之, 納以爲妃. 有賢行, 能內輔, 時人謂之二聖.

5년 봄 정월에 용이 알영정에 나타났다.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여자 아이를 탄생시켰다. 늙은 할머니가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거두어 길렀다. 우물 이름으로 그 아이를 이름하였다. 장성하게 되자 덕스러운 용모가 있었다. 시조가 이를 듣고 들여서 후비로 삼았다. 현명한 행실이 있었고 안에서 보좌를 잘 했다. 그때 사람들이 그들을 두 성인이라고 불렀다.

八年, 倭人行兵, 欲犯邊, 聞始祖有神德, 乃還.

8년 왜나라 사람이 병사를 움직여 변방을 침범하고 하였는데 시조에게 신령스러운 덕이 있음을 듣고 곧 돌아갔다.

九年, 春三月, 有星孛于王良.

9년 봄 3월에 살별이 왕량성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었다.

十四年, 夏四月, 有星孛于參.

14년 여름 4월에 살별이 삼성을 어지럽히는 일이 있었다.

十七年, 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

17년에 왕이 6부를 순행하고 위로하였는데 후비 알영이 그를 따랐다.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독려하여 땅의 이로움을 다하게끔 하였다.

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

19년 봄 정월에 변한이 나라를 갖고 항복해 왔다.

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 是歳, 高句麗始祖東明立.

21년 수도에 성을 쌓았고 금성이라고 불렀다. 이 해에 고구려 시조 동명이 왕위에 올라 섰다.

二十四年, 夏六月壬申晦, 日有食之.

24년 여름 6월 임신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六年, 春正月, 營宮室於金城.

26년 봄 정월에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三十年, 夏四月己亥晦, 日有食之. 樂浪人將兵來侵. 見邊人夜户不扃,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不相盗, 可謂有道之國. 吾儕濳師而襲之, 無異於盗, 得不愧乎.” 乃引還.

30년 여름 4월 기해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낙랑 사람이 병사를 이끌고 침범해 왔는데 변방 사람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곡식단이 들판을 덮고 있는 것을 보고 서로에게 말하였다. “이 지방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으니 도가 있는 나라라고 할 만하다. 우리들이 군사를 숨겨 습격하는 것은 도둑과 다름 없으니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곧 돌아갔다.

三十二年, 秋八月乙卯晦, 日有食之.

32년 가을 8월 을묘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38년 봄 2월에 호공을 파견하여 마한에 빙문하게 하였다.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 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 天時和, 倉庾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마한의 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진, 변 두 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직분에 맞는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사대의 예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처음 일어나고부터 인사가 닦이고 천시가 화목하며 창고는 가득 차고 사람들은 공경하고 양보하니 진한 유민들부터 변한, 낙랑, 왜나라 사람들까지 두려움을 품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우리 왕은 겸허하셔서 아래 신하를 파견해 빙문하고 우호 관계를 닦게 하셨으니 예법에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대왕께서는 불끈 노하셔서 병사로 겁박하시니 이는 무슨 의미입니까?”

王憤欲殺之, 左右諫止, 乃許歸.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寖盛. 故馬韓忌之, 有責焉. 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度(渡)海而來, 故稱瓠公.

왕이 분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좌우 신하들이 간언하여 그만두었고 곧 돌아가길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의 사람들이 진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자들이 여럿이었는데 마한 동쪽에 많이 거처하여 진한과 섞여 살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점점 강성해졌다. 그러므로 마한이 그를 꺼려서 책망한 일이 있었다. 호공이란 자는 그 종족과 성씨가 상세하지 않은데 본래 왜나라 사람이며 처음에 박을 허리에 매고 바다를 건너 왔으므로 호공이라고 불렀다.

三十九年, 馬韓王薨. 或說上曰: “西韓王前辱我使, 今當其喪征之, 其國不足平也.” 
上曰: “幸人之災, 不仁也.” 不從, 乃遣使弔慰.

39년 마한의 왕이 죽었다. 어떤 이가 왕을 설득하며 말하였다. “서한의 왕이 전에 우리 사신을 모욕하였는데 지금 그 상을 당하였으니 그들을 정벌한다면 그 나라를 평정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 그러고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四十年, 百濟始祖溫祚立.

40년에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라 섰다.

四十三年, 春二月乙酉晦, 日有食之.

43년 봄 2월 을유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다.

五十三年,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匹曰: “寡君問南韓有聖人出, 故遣臣來享.”

53년에 동옥저의 사자가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치며 말하였다. “저희 임금이 남쪽의 한에서 성인이 나왔다는 말을 들으셨으므로 저를 보내 와 선물을 드리게 하였습니다.”

五十四年, 春二月己酉, 星孛于河鼓.

54년 봄 2월 기유일에 살별이 하고성을 어지럽혔다.

五十六年, 春正月辛丑朔, 日有食之.

56년 봄 정월 신축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五十九年, 秋九月戊申晦, 日有食之.

59년 가을 9월 무신 그믐일에 일식이 있었다.

六十年, 秋九月, 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 震城南門.

60년 가을 9월에 두 용이 금성 우물 안에 나타났다.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며 성 남문에 번개가 쳤다.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升遐. 葬虵陵, 在曇巖寺北.

61년 봄 3월에 거서간이 승하하였다. 사릉에 장사 지냈으며 (사릉은) 담암사 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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