又는 오른손을 본뜬 글자이며, 右의 본자이다. 원래 의미는 {오른손}이다. 가차되어 {또}라는 의미를 나타내게 되자 한 글자에 여러 의미가 들어가 혼란이 생겼다. 이에 口를 붙여 右를 만들어냈다. 가차는 문자 현상이다. {오른손}이란 의미는 파생(인신)을 통해 {돕다}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오른손' 혹은 '오른팔'은 비유적인 의미로 '중요한 역할을 맡아 도와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다시 한 글자에 의미가 늘어나 혼란이 발생한다. 따라서 人을 붙여 佑(혹은 示를 붙여 祐)를 만들어냈다. {돕다}라는 의미에서 다시 '나를 도와주는 우호적인 사람'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역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又 2개를 겹쳐 㕛(友)를 만들었다.
出은 '나오다, 나가다, 출발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글자이다. 현대 해서체의 모양은 두 개의 山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산이 아래위로 솟아나오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는 낭설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는 해서체는 위진시대를 거쳐 당나라 이후에야 정립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설은 근거가 없다. 出의 갑골문 형태는 止와 凵으로 구성되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움집에 살았는데 凵 혹은 𠙵은 움을 본뜬 것이다.("坎(감, 구덩이)의 상형 초문은 본래 "凵"으로 되어 있다). 전체의 자형은 발이 움집을 떠나는 것으로 밖에서 나가는 것을 나타내었다. 1) 그렇다면 '들어오다, 들어가다, 도착하다' 등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발을 나타내는 止를 상하반전시키면 되지 않을까?
실제로 갑골문에는 그런 글자가 있다. 이것은 𢓜(⿰彳各)의 초문(初文)이다. 자형은 발이 움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온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2) 各자의 소리를 가차하여 '각각, 각별' 등의 추상적 의미를 가지는 단어를 나타내었고, 본래 의미인 '도달하다, 오다' 등의 의미는 格자를 차용하여 표현하게 되었다. 3) ≪에기(禮記)≫<대학(大學)>에 나오는 "格物致知(사물의 이치에 이르러 나의 지식을 지극히 하다)"의 格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1) 추시구이(裘錫圭) 저, 이홍진 역, ≪중국문자학의 이해≫(원서 ≪文字學槪要≫), 234쪽 참고.
“𠂤”는 “堆(퇴)”의 옛 글자로 고대에 인공으로 쌓아올린 집터의 한 종류인 건축물을 가리키는 데 썼을 가능성이 있다. 堆는 지면에서 높이 나온 것이다. “隹(추)”의 발음을 따르는 글자는 왕왕 높이 나오다라는 의미를 머금고 있다. 설문해자의 “嵟(퇴)는 높은 것이다.” “崔(최)는 크고 높은 것이다.” “陮(퇴)는 험한 것이니 높은 것이다.” “顀(추)는 내민 이마이다.”가 모두 예시이다. 둔부는 옛날에 “脽(수)”라고 일컬었다. 한서 무제기 원정 4년 “11월 갑자에 분음 脽 위에 후토의 사당을 세웠다”의 안사고 주석에는 “脽라는 것은 그 형체가 높이 서있어서 사람의 엉덩이와 같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둔부를 脽라고 부른 것은 대개 그것이 등이나 다리에 비해 돌출되어 있는 것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脽” “臀”은 옛날에 성모1)가 서로 가까웠다. “脽”는 微부에 속하고 “臀”은 文부에 속하는데, 두 부는 음양대전(陰陽對轉)2)이다. 이 두 개의 단어가 동원관계가 있다는 것은 의심이 없다. 석명 석형체에 “臀은 殿이니 높고 두터워 걸림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殿”을 “臀”의 성훈자로 삼았다. 고대에 높고 큰 당을 일컬어 전이라고 했다. 초학기 권24 거처부에서 창힐편을 인용하여 “殿은 큰 당이다.”라고 했는데 옛날에 이른바 당이라고 한 것은 본래 후세에 이른바 집터라고 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𠂤”(堆)와 “殿”도 마땅히 동원사이다. “𠂤”(堆)가 바뀌어 “殿”이 된 것은 “脽”가 바뀌어 “臀”이 된 것과 같다.
1) 음절 첫머리 자음 2) 모음으로 끝나는 음절이 비음으로 끝나는 음절과 서로 교체되는 것. ‘장차’라는 시간 부사인 且가 將으로 바뀌는 것이 음양대전의 예시이며, 두 단어는 어원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