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曰:

"學而時2)習之, 不亦說(悅)乎?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마다 그것을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어떤 친구가 먼 지방으로부터 오면 즐겁지 않겠는가?

人不知而不慍3), 不亦君子乎?"

남이 알아주지 못해도 성내지 않는다면 군자답지 않겠는가?"


1) 선생, 스승.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2) 주희는 '때마다, 항상'으로 풀이했으나, 고서에 보이는 '以時, 時中' 등의 용법을 본다면 '때에 맞게'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3) (온) 성내다.


학이편에 사용된 한자 PDF 다운: https://cafe.naver.com/eastasianclassics/52

 

https://youtu.be/1twCvRMNZCI

 

논어집주 원문 및 역주(譯注) 학이편 - 술이편 [유료]

https://www.happycampus.com/exam-doc/26356650/

 

<<논어집주(論語集註)>> 원문 및 해석 <학이>~<술이> 시험자료

1장 ⼦⽈: “學⽽時習之면 不亦說(悅)乎아? 有朋이 ⾃遠⽅來면 不亦樂乎아? ⼈不知⽽不慍이면 不亦君⼦乎아?”1)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수시로 익히면 기쁘지 않은가? 벗이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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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재에서 월운 씀

≪史記≫<列傳>曰: “孟軻, 趙氏曰: “孟子, 魯公族孟孫之後.” 漢書注云: “字子車.” 一說: “字子輿.” 騶人也, 騶亦作鄒, 本邾國也. 受業子思之門人. 子思, 孔子之孫, 名伋. 索隱云: “王劭以人爲衍字.” 而趙氏註及孔叢子等書亦皆云: “孟子親受業於子思.” 未知是否. 道旣通, 趙氏曰: “孟子通五經, 尤長於詩書.” 程子曰: “孟子曰: ‘可以仕則仕, 可以止則止, 可以久則久, 可以速則速.’, ‘孔子聖之時者也.’ 故知易者莫如孟子. 又曰: ‘王者之跡熄而詩亡, 詩亡然後春秋作.’ 又曰: ‘春秋無義戰.’ 又曰: ‘春秋天子之事’, 故知春秋者莫如孟子.” 尹氏曰: “以此而言, 則趙氏謂孟子長於詩書而已, 豈知孟子者哉?” 游事齊宣王, 宣王不能用. 適梁, 梁惠王不果所言, 則見以爲迂遠而闊於事情. 按史記: “梁惠王之三十五年乙酉, 孟子始至梁. 其後二十三年, 當齊湣王之十年丁未, 齊人伐燕, 而孟子在齊.” 故古史謂 “孟子先事齊宣王後乃見梁惠王·襄王·齊湣王.” 獨孟子以伐燕爲宣王時事, 與史記·荀子等書皆不合. 而通鑑以伐燕之歲, 爲宣王十九年, 則是孟子先游梁而後至齊見宣王矣. 然考異亦無他據, 又未知孰是也. 當是之時, 秦用商鞅, 楚魏用吳起, 齊用孫子·田忌. 天下方務於合從連衡, 以攻伐爲賢, 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 是以所如者不合. 退而與萬章之徒序詩書, 述仲尼之意, 作孟子七篇.” 趙氏曰: “凡二百六十一章, 三萬四千六百八十五字.” 韓子曰: “孟軻之書, 非軻自著. 軻旣沒, 其徒萬章·公孫丑相與記軻所言焉耳.” 愚按: 二說不同, 史記近是.

≪사기≫ <열전>에서 말하였다. “맹가는 조씨가 말하였다. “맹자는 노나라 공족 맹손씨의 후손이다.” 한서 주석에서 말하길 “자(字)는 자거이다.”라고 했고 일설에는 “자(字)는 자여이다.”라고 한다. 추나라 사람이니 騶자는 또 鄒라고도 쓰니 본래 주(邾)나라이다. 자사의 문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자사는 공자의 손자이니 이름이 급(伋)이다. 색은에서 말하길 “왕소는 人을 잘못 들어간 글자이다.”라고 했고 조씨의 주석과 공총자 등의 책에서도 모두 “맹자는 자사에게서 직접 학업을 받았다”라고 말하니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겠다. 도가 통하고 나서 조씨가 말하였다. “맹자는 오경에 능통했고 시경과 서경에는 더욱 뛰어났다.” 정자가 말하였다. “맹자가 말하길 ‘벼슬할 수 있으면 벼슬하고 멈출 수 있으면 멈추며 오래할 수 있으면 오래 하고 빨리 할 수 있으면 빨리 한다.’, ‘공자는 성인 가운데 때를 안 자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주역을 안 자는 맹자와 같은 이가 없다. 또 말하길 ‘왕의 자취가 사라지자 시가 사라졌고 시가 사라진 뒤에 춘추가 지어졌다.’라고 했다. 또 말하길 ‘춘추에는 의로운 전쟁이 없다’라고 했다. 또 말하길 ‘춘추는 천자의 일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춘추를 아는 자는 맹자와 같은 이가 없다.” 윤씨가 말하였다. “이것으로 말하면 조씨는 맹자가 시경과 서경에 뛰어나다고 말했을 뿐이니 어찌 맹자를 알겠는가?” 제나라 선왕을 섬기러 갔으나 선왕이 등용하지 못했다. 양나라로 갔으나 양나라 혜왕이 (맹자가) 말한 것을 실행하지 못하였으니 곧 (현실에서) 동떨어져 물정에 어둡다고 여겨졌다. 사기를 살펴보니 “양나라 혜왕의 35년인 을유년에 맹자가 비로소 양에 도착했다. 그 뒤 23년에 제나라 민왕의 10년인 정미년을 맞이하여 제나라 사람이 연나라를 정벌하였는데 맹자가 제나라에 있었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고사에서 말하길 “맹자는 먼저 제나라 선왕을 섬기고 뒤에 곧 양나라 혜왕, 양왕, 제나라 민왕을 만났다”라고 했다. 오직 맹자만이 연나라를 벌하는 것을 선왕 당시의 일이라고 여겼으니 사기, 순자 등의 책과 모두 부합하지 않는다. 통감에서 연나라를 정벌한 해를 선왕 19년이라고 하였으니 곧 맹자가 먼저 양나라로 간 뒤에 제나라에 도착해 선왕을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통감고이에도 다른 근거가 없으니 또 어느 것이 맞는지 알지 못하겠다. 이때를 맞이하여 진(秦)나라는 상앙을 등용하고 초나라와 위나라는 오기를 등용하고 제나라는 손자와 전기를 등용하였다. 천하가 한창 합종(合縱)과 연횡(連橫)에 힘써 공격하고 정벌하는 것을 훌륭하다고 여겼으나 맹가는 마침내 당나라, 우나라, 삼대(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덕을 전술하였으니 이 때문에 도착한 곳에서 (뜻이) 합치되지 않았다. 물러나 만장 등의 무리와 함께 시경과 서경을 순서 짓고 중니의 뜻을 전술하여 ≪맹자≫ 7편을 지었다.” 조씨가 말하였다. “모두 261장이고 34,685자이다.” 한자가 말하였다. “맹가의 책은 맹가가 스스로 저술한 것이 아니다. 맹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그 무리인 만장과 공손추가 서로 함께 맹가가 한 말을 기록한 것일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두 설이 같지 않으니 사기가 사실에 가까운 듯하다.

 

韓子曰: “堯以是傳之舜, 舜以是傳之禹, 禹以是傳之湯, 湯以是傳之文·武·周公, 文·武·周公傳之孔子, 孔子傳之孟軻, 軻之死不得其傳焉. 荀與揚也, 擇焉而不精, 語焉而不詳.” 程子曰: “韓子此語, 非是蹈襲前人, 又非鑿空撰得出, 必有所見. 若無所見, 不知言所傳者何事.”

한자(한유)가 말하였다. “요 임금은 이것을 순 임금에게 전하였고, 순 임금은 이것을 우 임금에게 전하였고, 우 임금은 이것을 탕 임금에게 전하였고, 탕 임금은 이것을 문왕, 무왕, 주공에게 전하였고 문왕, 무왕, 주공은 공자에게 전하였고 공자는 맹가에게 전하였으니 맹가가 죽자 그 전을 얻지 못하였다. 순황과 양웅은 선택은 했으나 정밀하지 못했고 말은 했으나 상세하지 못했다.” 정자가 말하였다. “한자의 이 말은 앞시대 사람을 답습한 것이 아니고 또 빈 말을 꾸며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니 반드시 본 바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 본 바가 없다면 전한 바라고 말한 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又曰: “孟氏醇乎醇者也. 荀與揚, 大醇而小疵.” 程子曰: “韓子論孟子甚善. 非見得孟子意, 亦道不到. 其論荀揚則非也. 荀子極偏駁, 只一句性惡, 大本已失. 揚子雖少過, 然亦不識性, 更說甚道.”

(한유가) 또 말하였다. “맹씨는 순하고도 순한 자이다. 순황과 양웅은 크게는 순하나 작게는 흠이 있다.” 정자가 말하였다. “한자는 맹자가 매우 선하다고 논하였다. 맹자의 뜻을 이해한 것이 아니면 또한 도가 도달하지 못한다. 그가 순황과 양웅을 논한 것은 잘못이다. 순자는 극도로 치우치고 뒤섞였으니 다만 성악 한 구절은 큰 근본이 이미 상실되었다. 양자는 비록 잘못이 적으나 또한 본성을 알지 못하였으니 곧 무슨 도를 말하겠는가.”

又曰: “孔子之道大而能博, 門弟子不能遍觀而盡識也, 故學焉而皆得其性之所近. 其後離散, 分處諸侯之國, 又各以其所能授弟子, 源遠而末益分. 惟孟軻師子思, 而子思之學出於曾子. 自孔子沒, 獨孟軻氏之傳得其宗. 故求觀聖人之道者, 必自孟子始.” 程子曰: “孔子言參也魯. 然顏子沒後, 終得聖人之道者, 曾子也. 觀其啟手足時之言, 可以見矣. 所傳者子思·孟子, 皆其學也.”

(한유가) 또 말하였다. “공자의 도는 크고 넓어서 문하의 제자들은 두루 보아 전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배워서 모두 그 품성의 가까운 것을 얻었다. 그 후에 흩어져 제후들의 나라에 나누어 살았고 또 각각 그 잘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전수했으니 근원에서 멀어져 말단이 더욱 나누어졌다. 오직 맹가만이 자사를 스승 삼았고 자사의 학문은 증자에게서 나왔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고부터는 오직 맹가의 전이 그 종지를 얻었다. 그러므로 성인의 도를 보기를 구하는 것은 반드시 맹자로부터 시작된다.” 정자가 말하였다. “공자는 삼이 노둔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안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 끝내 성인의 도를 얻은 자는 증자이다. 그 손발을 연 때의 말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전한 것은 자사와 맹자 모두 그 학문이다.”

又曰: “揚子雲曰: ‘古者楊墨塞路, 孟子辭而闢之, 廓如也.’ 夫楊墨行, 正道廢. 孟子雖賢聖, 不得位. 空言無施, 雖切何補. 然賴其言, 而今之學者尚知宗孔氏, 崇仁義, 貴王賤霸而已. 其大經大法, 皆亡滅而不救, 壞爛而不收. 所謂存十一於千百, 安在其能廓如也? 然向無孟氏, 則皆服左衽而言侏離矣. 故愈嘗推尊孟氏, 以爲功不在禹下者, 爲此也.”

(한유가) 또 말하였다. “양자운(양웅)이 말하길 ‘옛날에 양묵이 길을 막자 맹자가 말하여 열었으니 넓었다.’라고 했다. 양주와 묵적이 행하자 바른 도가 버려졌다. 맹자가 비록 성현이지만 지위를 얻지 못했다. 헛되이 말하여 베푼 것이 없었으니 비록 간절하긴 지만 무엇에 도움이 되었겠는가. 그러나 그 말에 의지하여 지금의 배우는 자들이 여전히 공씨를 종주로 삼고 인과 의를 숭상하며 왕도를 귀하게 여기고 패도를 천하게 여길 줄 알 뿐이다. 그 큰 원칙과 큰 법칙은 모두 사라져 구하지 못하였으며 썩어 문드러져 거두지 못하였다. 이른바 1000이나 100에 10이나 1이 남아 있는 것이니 그 넓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이전에 맹씨가 없었다면 모두 왼섶을 입고 오랑캐의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일찍이 맹씨를 추존하여 공로가 우 임금의 아래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或問於程子曰: “孟子還可謂聖人否?” 程子曰: “未敢便道他是聖人, 然學已到至處.” 愚按: 至字, 恐當作聖字.

어떤 사람이 정자에게 물었다. “맹자도 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자가 말하였다. “감히 바로 그가 성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학문이 이미 지극한 곳에 이르렀다.” 내가 생각하기에 至자는 아마 聖자로 써야 할 듯하다.

程子又曰: “孟子有功於聖門, 不可勝言. 仲尼只說一箇仁字, 孟子開口便說仁義. 仲尼只說一箇志, 孟子便說許多養氣出來. 只此二字, 其功甚多.”

정자가 또 말하였다. “맹자는 성인의 문하에 공로가 있으니 이루 다 말하지 못한다. 중니는 다만 인(仁)자 한 개를 말하였으나 맹자는 입을 열면 바로 인의(仁義)를 말하였다. 중지는 다만 지(志)자 한 개를 말하였으나 맹자는 바로 수많은 양기(養氣)를 말해냈다. 다만 이 두 글자는 그 공로가 매우 많다.”

又曰: “孟子有大功於世, 以其言性善也.”

(정자가) 또 말하였다. “맹자는 세상에 큰 공로가 있으니 성선을 말한 것 때문이다.”

又曰: “孟子性善·養氣之論, 皆前聖所未發.”

(정자가) 또 말하였다. “맹자의 성선과 양기의 논의는 모두 이전의 성인이 밝히지 않은 것이었다.”

又曰: “學者全要識時. 若不識時, 不足以言學. 顏子陋巷自樂, 以有孔子在焉. 若孟子之時, 世旣無人, 安可不以道自任.”

(정자가) 또 말하였다. “배우는 자는 오로지 때를 알아야 한다. 만약 때를 알지 못하면 학문을 말하기에 부족하다. 안자는 누항에서 스스로 즐거워했으니 공자가 거기 계셨기 때문이다. 맹자의 시대 같은 경우는 세상에 이미 그런 사람이 없으니 어찌 도를 스스로 맡지 않을 수 있겠는가?”

又曰: “孟子有些英氣. 纔有英氣, 便有圭角, 英氣甚害事. 如顏子便渾厚不同, 顏子去聖人只豪髮閒. 孟子大賢, 亞聖之次也.” 或曰: “英氣見於甚處?” 曰: “但以孔子之言比之, 便可見. 且如冰與水精非不光. 比之玉, 自是有溫潤含蓄氣象, 無許多光耀也.”

(정자가) 또 말하였다. “맹자는 약간 영기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영기가 있으면 바로 규각이 있게 되니 영기는 일에 매우 해롭다. 안자 같은 경우는 바로 순수하고 인정이 두터워 (맹자와) 같지 않았으니 안자는 성인과의 거리가 다만 털 한 가닥 사이였다. 맹자는 대현으로 아성의 다음이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영기가 어디에 나타납니까?” (정자가) 말하였다. “다만 공자의 말씀과 비교하면 바로 볼 수 있다. 또 얼음과 수정이 빛나지 않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옥에 비교하자면 스스로 따뜻하고 윤기가 있는 것이 함축된 기상이 있는 것이니 수많은 광택은 없다.”

楊氏曰: “≪孟子≫一書, 只是要正人心, 敎人存心養性, 收其放心. 至論仁·義·禮·智, 則以惻隱·羞惡·辭讓·是非之心爲之端. 論邪說之害, 則曰: ‘生於其心, 害於其政.’ 論事君, 則曰: ‘格君心之非’, ‘一正君而國定’. 千變萬化, 只說從心上來. 人能正心, 則事無足爲者矣. 大學之脩(修)身·齊家·治國·平天下, 其本只是正心·誠意而已. 心得其正, 然後知性之善. 故孟子遇人便道性善. 歐陽永叔卻言 ‘聖人之敎人, 性非所先’, 可謂誤矣. 人性上不可添一物, 堯舜所以爲萬世法, 亦是率性而已. 所謂率性, 循天理是也. 外邊用計用數, 假饒立得功業, 只是人欲之私. 與聖賢作處, 天地懸隔.”

양씨(양시)가 말하였다. “≪맹자≫ 책 한 권은 다만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사람들이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수양하며 잃어버린 마음을 찾도록 만든다. 인의예지를 말한 곳에 이르러서는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으로 단서를 삼았다. 사설의 해를 말한 곳에 이르러서는 곧 ‘그 마음에서 생겨나 그 정치를 해친다’고 말하였다. 임금을 섬기는 것을 말한 곳에 이르러서는 곧 ‘임금의 마음의 잘못을 바로잡는다’, ‘한번 임금을 바로 잡으면 나라가 안정된다’라고 말하였다. 천만번 변화하여 다만 마음에서부터 말해왔다. 사람이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일이 하잘 것이 없을 것이다. 대학의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는 그 근본이 다만 정심, 성의일 뿐이다. 마음이 바름을 얻은 뒤에 본성이 선함을 안다. 그러므로 맹자는 사람을 만나면 바로 본성이 선하다고 말하였다. 구양영숙(구양수)은 반대로 ‘성인이 사람을 가르칠 때 본성은 우선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으니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의 본성에는 한 물건도 붙일 수 없고 요 임금과 순 임금이 만세의 본보기가 된 이유도 본성을 따랐을 뿐이다. 이른바 본성을 따르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다. 밖에서 계책를 쓰고 술수를 써서 가령 공업을 세운다고 해도 다만 인욕의 사사로움일 뿐이다. 성현이 일으킨 것과는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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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집주≫  (0) 2021.07.09

≪史記≫<世家>曰: “孔子名丘, 字仲尼. 其先宋人. 父叔梁紇, 母顏氏, 以魯襄公二十二年, 庚戌之歲, 十一月庚子, 生孔子於魯昌平鄕陬邑. 爲兒嬉戲, 常陳俎豆, 設禮容. 及長, 爲委吏, 料量平, 委吏, 本作季氏史. 索隱云: “一本作委吏, 與孟子合.” 今從之. 爲司職吏, 畜蕃息. 職, 見周禮牛人, 讀爲樴, 義與杙同, 蓋繫養犧牲之所. 此官卽孟子所謂乘田. 適周, 問禮於老子, 旣反, 而弟子益進. 昭公二十五年甲申, 孔子年三十五, 而昭公奔齊, 魯亂. 於是適齊, 爲高昭子家臣, 以通乎景公. 有聞韶·問政二事. 公欲封以尼谿之田, 晏嬰不可, 公惑之. 有季孟吾老之語. 孔子遂行, 反乎魯. 定公元年壬辰, 孔子年四十三, 而季氏強僭, 其臣陽虎作亂專政. 故孔子不仕, 而退修詩·書·禮·樂, 弟子彌衆. 九年庚子, 孔子年五十一. 公山不狃以費畔季氏, 召, 孔子欲往, 而卒不行. 有答子路東周語. 定公以孔子爲中都宰, 一年, 四方則之, 遂爲司空, 又爲大司寇. 十年辛丑, 相定公會齊侯于夾谷, 齊人歸魯侵地. 十二年癸卯, 使仲由爲季氏宰, 墮三都, 收其甲兵. 孟氏不肯墮成, 圍之不克. 十四年乙巳, 孔子年五十六, 攝行相事, 誅少正卯, 與聞國政. 三月, 魯國大治. 齊人歸女樂以沮之, 季桓子受之. 郊又不致膰俎於大夫, 孔子行. 魯世家以此以上皆爲十二年事. 適衛, 主於子路妻兄顏濁鄒家. 孟子作顏讎由. 適陳, 過匡, 匡人以爲陽虎而拘之. 有顏淵後及文王旣沒之語. 旣解, 還衛, 主蘧伯玉家, 見南子. 有矢子路及未見好德之語. 去適宋, 司馬桓魋欲殺之. 有天生德語及微服過宋事. 又去, 適陳, 主司城貞子家. 居三歲而反于衛, 靈公不能用. 有三年有成之語. 晉趙氏家臣佛肸以中牟畔, 召孔子, 孔子欲往, 亦不果. 有答子路堅白語及荷蕢過門事. 將西見趙簡子, 至河而反, 又主蘧伯玉家. 靈公問陳, 不對而行, 復如陳. 據論語則絕糧當在此時. 季桓子卒, 遺言謂康子必召孔子, 其臣止之, 康子乃召冉求. 史記以論語歸與之歎爲在此時, 又以孟子所記歎辭爲主司城貞子時語, 疑不然. 蓋語孟所記, 本皆此一時語, 而所記有異同耳. 孔子如蔡及葉. 有葉公問答子路不對·沮溺耦耕·荷蓧丈人等事. 史記云: “於是楚昭王使人聘孔子, 孔子將往拜禮, 而陳蔡大夫發徒圍之, 故孔子絕糧於陳蔡之間.” 有慍見及告子貢一貫之語. 按是時陳蔡臣服於楚, 若楚王來聘孔子, 陳蔡大夫安敢圍之. 且據論語, 絕糧當在去衛如陳之時. 楚昭王將以書社地封孔子, 令尹子西不可, 乃止. 史記云 “書社地七百里”, 恐無此理, 時則有接輿之歌. 又反乎衛, 時靈公已卒, 衛君輒欲得孔子爲政. 有魯衛兄弟及答子貢夷齊·子路正名之語. 而冉求爲季氏將, 與齊戰有功, 康子乃召孔子, 而孔子歸魯, 實哀公之十一年丁巳, 而孔子年六十八矣. 有對哀公及康子語. 然魯終不能用孔子, 孔子亦不求仕, 乃敘書傳禮記. 有杞宋·損益·從周等語. 刪詩正樂, 有語大師及樂正之語. 序易彖·繫·象·說卦·文言. 有假我數年之語.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七十二人. 弟子顏回最賢, 蚤死, 後惟曾參得傳孔子之道. 十四年庚申, 魯西狩獲麟, 有莫我知之歎. 孔子作春秋. 有知我罪我等語, 論語請討陳恆事, 亦在是年. 明年辛酉, 子路死於衛. 十六年壬戌·四月己丑, 孔子卒, 年七十三, 葬魯城北泗上. 弟子皆服心喪三年而去, 惟子貢廬於冢上, 凡六年, 孔子生鯉, 字伯魚, 先卒. 伯魚生伋, 字子思, 作中庸.” 子思學於曾子, 而孟子受業子思之門人.

≪사기≫ <세가>에서 말하였다. “공자는 이름이 구()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다. 그 선조는 송나라 사람이다. 아버지는 숙량 흘이고 어머니는 안씨이니 노나라 양공 22년인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공자를 낳았다. (공자는) 아이였을 적에 놀이를 할 때면 항상 제기를 늘어놓고 예의 바른 차림새를 갖추었다. 장성하자 위리(창고 관리자)가 되었는데 계산이 공평했고, 위리(委吏)는 원래 계씨사(季氏史)라고 썼다. 색은에 말하길 “어떤 판본에는 위리(委吏)라고 되어 있으니 맹자와 부합한다.”라고 하니 지금 그것을 따른다. 사직리(가축 관리자)가 되었을 때는 가축이 번성했다. (직)은 주례(周禮) 우인(牛人)에 보이니 독음은 (직)이고 의미는 말뚝[]과 같다. 대개 희생을 기르는 곳이다. 이 관직은 맹자에서 말한 승전(乘田)이다. 주나라로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물었고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는 제자들이 더욱 많이 찾아왔다. 소공 25년인 갑신년에 공자는 나이가 35세였는데 소공이 제나라로 달아나자 노나라가 혼란해졌다. 이에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의 가신이 되어서 경공과 소통했다. 소() 음악을 듣고 정치를 물었다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 (경)공은 이계의 땅을 내려주고 싶었으나 안영이 동의하지 않으니 (경)공이 의혹하였다. 계씨, 맹씨, 내가 늙었다는 말이 있었다. 공자께서 마침내 (제나라를) 떠나서 노나라로 돌아왔다. 정공 원년인 임신년에 공자는 나이가 43세였는데 계씨가 강성해져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고 그 가신인 양호가 난을 일으켜 정권를 독차지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벼슬하지 않으시고 물어나서 시서예악을 닦으셨고 제자들은 더욱 많아졌다. (정공) 9년인 경자년에 공자의 나이는 51세였다. 공산불유가 비읍을 근거지로 하여 계씨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부르니 공자께서는 가고자 하셨으나 끝내 가지 않으셨다. 자로에게 동주라고 답한 말이 있었다. 정공이 공자를 중도재로 삼으니 1년이 지나 사방에서 그를 본받았고 마침내 사공이 되셨고 또 대사구가 되셨다. 10년인 신축년에 정공이 제나라 후작과 협곡에서 회맹하는 것을 도우니 제나라 임금이 빼앗은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12년인 계묘년에 중유를 시켜 계씨의 재상이 되게 하여 삼도를 무너뜨리고 그 갑옷과 병기를 수거하였다. 맹씨가 성읍을 무너뜨리려고 하지 않자 그를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정공 14년인 을사년에 공자는 나이가 56세였고 재상의 일을 겸하여 행했고 소정 묘를 죽이고 국정에 참여하여 들었다. 3개월이 지나 노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제나라 사람이 미녀인 연주자, 무용수들을 보내서 방해하니 계환자가 이를 받았다. 교 제사를 지내고도 제사에 쓴 고기를 대부들에게 보내지 않자 공자께서 떠나셨다. 노세가에는 이 이상을 모두 12년의 일이라고 했다. 위나라로 가서 자로의 처형 안탁추의 집에 머물렀다. 맹자에서는 안수유(顏讎由)로 썼다. 진()나라로 갈 때 광땅을 지나는데 광땅 사람들이 (공자를) 양호라고 생각하고 붙잡았다. 안연이 뒤처진 것과 문왕이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이 있었다. 풀려났을 때 위나라로 돌아가서 거백옥의 집에 머물었고 남자를 만났다. 자로에게 맹세한 것과 덕을 좋아하는 자를 보다는 말이 있었다. (위나라를) 떠나서 송나라로 갔는데 사마환퇴가 그를 죽이려 했다. 하늘에 덕을 내려주었다는 말과 미복이 송나라를 지나간 일이 있었다. 다시 떠나서 진()나라로 가 사성정자의 집에 머물렀다. 3년을 지내다가 위나라로 돌아갔으나 영공이 등용하지 못했다. 3년이면 성취가 있다는 말이 있었다. 진()나라 조씨의 가신 필힐이 중모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공자를 불렀는데 공자는 가고자 했으나 역시 그러지 않았다. 논어에 근거하면 양식이 떨어진 것이 이 때에 있어야 한다. 장차 서쪽으로 가서 조간자를 만나려 했는데 황하에 도착해서는 돌아와 다시 거백옥의 집에 머물렀다. 영공이 진법에 대해 묻자 대답하지 않고 (위나라를) 떠나 다시 진()나라로 갔다. 계환자가 생을 마감하고 강자에게 반드시 공자를 부르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 가신이 저지하니 강자가 곧 염구를 불렀다. 사기에서는 논어의 돌아가자는 탄식이 이때에 있었다고 했고 또 맹자가 기록한 탄식하는 말이 사성정자의 집에 머물 때의 말이라고 했으나 의심컨대 그렇지 않다. 대개 논어와 맹자에서 기록한 것은 본래 모두 이 한 때의 말이나 기록한 것이 다름이 있을 뿐이다. 공자는 채나라로 갔고 섭에 도착했다. 섭공이 물었는데 자로가 대답하지 않은 것, 장저와 걸닉이 밭을 갈던 것, 하조장인등의 일이 있었다. 사기에서 말하길 “이때 초나라 소왕이 사람을 시켜 공자를 불렀는데 공자가 가고자 하여 절을 하였으나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가 무리를 일으켜 포위하였으므로 공자께서는 진나라와 채나라의 사이에서 양식이 떨어지셨다”라고 하니 온견과 자공에게 일이관지라고 알린 말이 있었다. 살펴보건대 이때 진나라와 채나라는 초나라를 신하로서 섬겼으니 만약 초나라 왕이 공자를 불러오게 한다면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이 어떻게 감히 포위했겠는가. 또 논어를 근거하면 양식이 떨어진 것이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던 때에 있어야 한다. 초나라 소왕이 장차 서사땅을 공자에게 봉해주려 했으나 영윤 자서가 동의하지 않아서 곧 그만두었다. 사기에서는 “서사땅은 700리이다”라고 했는데 아마 이럴 리는 없을 듯하다. 이때는 접여의 노래가 있었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갔는데 이때는 영공이 이미 생을 마감하였고 위나라 임금 첩이 공자를 얻어 정치를 하고자 하였다. 노나라와 위나라는 형제라는 것과 자공에게 백이숙제, 자로에게 정명을 답한 말이 있었다. 염구가 계씨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와 싸워서 공을 세우니 강자가 곧 공자를 불렀고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갔으니 실로 애공 12년인 정사년에 공자는 나이가 67세였다. 애공과 강자에게 대답한 말이 있었다.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못했고 공자도 벼슬을 구하지 않아서 곧 서전, 예기의 차례를 바로잡았다. 기나라와 송나라, 덜어낸 것과 더해진 것, 주나라를 따르겠다 등의 말이 있었다. 시를 산삭하고 음악을 바로잡았고 태사에게 말한 것과 음악이 바르게 되었다는 말이 있었다. 주역 단전, 계사전, 상전, 설괘전, 문언전을 차례 지었다. 제자 가운데 안회가 가장 훌륭하나 일찍 죽어서 뒤에 오직 증삼이 공자의 도를 전할 수 있었다. 제자는 거의 3천명이었고 몸소 육예에 통달한 자가 72 사람이었다. 14년인 경신년에 노나라의 서쪽에서 기린을 잡았고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다. 공자는 춘추를 지었다. 나를 알고 나를 욕한다 등의 말이 있었고 논어의 진항을 성토하길 청한다는 일이 역시 이 해에 있었다. 다음 해인 신유년에 자로가 위나라에서 죽었다. 16년인 임술년 4월 기축일에 공자가 생을 마감하였는데 나이가 73세였고 노성 북쪽 사수 가에 장사 지냈다. 제자가 모두 마음으로 상복을 3년 동안 입고 떠났는데 오직 자공만은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모두 6년을 보냈고 공자는 리()를 낳았는데 자()는 백어(伯魚)이고 먼저 생을 마감했다. 백어는 급()을 낳았는데 자()는 자사(子思)이고 중용을 지었다.” 자사는 증자에게 배웠고 맹자는 자사의 문인에게 학업을 받았다.

 

何氏曰: “魯論語二十篇. 齊論語別有<問王>·<知道>, 凡二十二篇, 其二十篇中章句, 頗多於魯論. 古論出孔氏壁中, 分<堯曰>下章'子張問'以爲一篇, 有兩<子張>, 凡二十一篇, 篇次不與齊魯論同.”

하씨(하안)가 말하였다. “노나라 논어는 20편이다. 제나라 논어는 <문왕>편과 <지도>편이 따로 있어 모두 22편이다. 그 20편 안의 장구가 노나라 논어보다 꽤 많다. 옛 논어가 공씨의 벽 속에서 나왔는데 <요왈> 아래의 장인 자장문을 나누어서 한 편으로 만들어 두 개의 <자장>편이 있으니 모두 21편으로 편차가 제나라 논어와 같지 않다.”

 

程子曰: “≪論語≫之書, 成於有子曾子之門人, 故其書獨二子以子稱.”

정자가 말하였다. “≪논어란 책은 유자, 증자의 문인들에게서 만들어졌으므로 그 책에서 오직 두 선생만 선생이라고 부른다.”

 

程子曰: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知好之者, 有讀了後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정자가 말하였다. “≪논어를 읽을 때, 다 읽고 전혀 아무 일도 없는 자가 있고, 다 읽은 뒤에 한두 구절을 깨달아 기뻐하는 자가 있으며, 다 읽은 뒤에 논어를 좋아할 줄 아는 자가 있고, 다 읽은 뒤에 곧장 손이 춤추고 발이 뛰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하는 자가 있다.”

 

程子曰: “今人不會讀書. 如讀論語, 未讀時是此等人, 讀了後又只是此等人, 便是不曾讀.”

정자가 말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만약 ≪논어를 읽을 때, 아직 읽지 않았을 때에도 이 정도 사람이고, 다 읽은 뒤에도 그저 이 정도 사람이면 아직 읽지 않은 것이다.”

 

程子曰: “自十七八讀論語, 當時已曉文義. 讀之愈久, 但覺意味深長.”

정자가 말하였다. “내가 17 - 18세때부터 ≪논어를 읽었는데 그때 이미 글의 의미는 깨달았다. 독서가 더욱 길어졌을 때 다만 의미가 깊고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1twCvRMNZCI&list=PLWPw126ycfAbDwqL4OVXzckHAYXd89CSP&index=2 

모성재에서 월운 씀

이사전을 읽다.     이업(李鄴)

 

欺暗常不然

어둠을 속이는 것도 항상 옳지는 않은데

欺明當自戮

밝음을 속였으니 마땅히 스스로 죽어야 한다.

難將一人手

어렵다네, 한 사람의 손을 가지고

掩得天下目

​천하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는.

 

모성재에서 월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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