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안을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자신을 수양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 것은 사람은 그 친하게 여겨 좋아하는 것에 치우치게 되고, 그 천하게 여겨 싫어하는 것에 치우치게 되고, 그 두려워하여 공경하는 것에 치우치게 되고, 그 슬퍼하여 불쌍해하는 것에 치우치게 되고, 그 오만하고도 게으르게 대하는 것에 치우치게 되니 그러므로 좋아하는데 그 나쁨을 알고, 싫어하는데 그 아름다움을 아는 자는 천하에 드물다.
故諺7)有之曰: “人莫知其子之惡, 莫知其苗8)之碩9).”
그러므로 속담에 이런 말이 있으니 “사람은 아무도 자기 자식의 나쁨을 알지 못하며, 아무도 자기 싹의 큼을 알지 못한다.”
此謂身不脩不可以齊其家.
이것을 자신이 수양되지 않으면 그 집안을 동등하게 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1) 한나라 정현(鄭玄)은 '가다(適)'로 설명했고, 주희(朱熹)는 '~에 대해(於)'로 보았다. 청나라 때 왕인지(王引之)는 "정현은 適으로 풀이했으나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왕인지의 저서 ≪경전석사(經傳釋詞)≫
2) 정현은 '譬(비)'로 읽고 '비유하다'로 풀이, 주희는 '僻(벽)'으로 읽고 '편벽되다, 치우치다'로 풀이했다.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 것은 마음에 화내는 것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고, 걱정하는 것이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다.
心不在焉4),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마음이 거기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此謂脩身在正其心.
이것을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1) 정자(程子)는 心으로 고쳐 읽었으며 주자(朱子)도 이를 따랐다. 身(몸, 자기자신)을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후대의 비판도 받았다. 이 장은 수신(修身)과 정심(正心)을 상호연관 지어서 해석한 장이기 때문에 주자학(朱子學)의 논리 내에서는 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소인은 한가롭게 지낼 때 선하지 못한 짓을 하는데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가 군자를 본 뒤에 슬그머니 그 선하지 못함을 숨기고 그 선함을 드러낸다. 남이 자기를 보는 것이 그 속을 들여다보는 듯할 것이니 그러면 어찌 유익하겠는가? 이것을 속에 꽉 차면 밖에 드러난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 있을 때 (생각을) 삼간다.
曾子9)曰: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증자가 말하였다. “열 개의 눈이 보는 바이며 열 개의 손이 가리키는 바이니 엄하리라.”
富潤10)屋, 德潤10)身, 心廣體胖11), 故君子必誠其意.
부유함은 가옥을 윤택하게 하고 덕스러움은 자기 몸을 윤택하게 하니 마음이 넓어지면 몸이 펴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생각을 (선으로) 채운다.
1) (오) 미워하다, 싫어하다.
2) 좋아하다.
3) 아름다운 여성(이성)
4) 慊 (겸) 속시원하다, 만족하다.
5) '愼其獨'의 '其獨'은 자기 혼자서만 알고 있는 마음속에 일어난 생각을 가리킨다. 이를 '홀로'라고 번역하면 이는 원문의 의미를 전혀 전달하지 못한다. '愼獨'은 마음이 발하고 난 뒤에 기미를 성찰하는 것을 말한다. 최석기, ≪대학(大學)≫ 106쪽 참고.